클래식에 취하다
우리가 무언가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에는 친숙하다는 감정과 경험적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
반면 좀 더 깊이 있게 무언가를 탐미하기 위해서는 친숙한 요소를 넘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호기심이라는 본능이 자극받는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고 즐기는 취미가 한두 가지쯤 있다. 누군가는 운동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독서를 좋아하며 어떤 이는 맛있는 것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런 취미들이 단순 취미에 그치지 않고 심화되면 스포츠 선수로, 작가로, 요리사나 요리 평론가로 발전한다.
인간이 이렇게 무언가에 빠져 마니아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먼저 친숙함이 우선되고 그다음 이를 통한 호기심과 탐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업가인 데보라 루(Debra Ruh)는 “접근성은 모든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해준다.”라고 하였다.
즉 접근의 용이함은 친숙함을 높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험으로 우리의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한 성취감은 뇌의 보상 시스템을 작용시켜 우리를 몰입으로 이끌어준다.
일반사람들이 위스키와 클래식음악에 입문해서 빠져드는 과정 또한 이러한 연결고리들이 강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블렌디드 위스키와 크로스오버 음악, 그리고 이들보다 심화된 싱글몰트와 클래식음악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와 다양한 유사점들이 있을까?
싱글몰트 위스키는 말 그대로 싱글(Single), 단일의 맥아(Malt)를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의 증류소에서 옥수수나 밀 등 다른 곡물을 섞지 않고 오직 보리맥아만을 사용하여 증류한 위스키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맥아로만 숙성된 여러 오크통 속의 증류원액들을 섞어서 만드는데, 하나의 오크통에서만 특별하게 생산되는 싱글 캐스크(Single Cask) 또한 싱글몰트의 하위개념으로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되는 스카치 싱글몰트 위스키에는 몇 가지 필수적인 요건이 있다.
앞서 언급한 단일 증류소와 100% 보리맥아의 사용 외에 알코올도수가 40도 이상을 유지해야 하며 오크통에서 3년 이상 숙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과 캐러멜 색소 외에는 첨가물이 금지되어 있다.
이런 싱글몰트는 각 지역의 테루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지역의 물과 토양, 공기, 보리, 그리고 증류소만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어 독특한 개성과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즉 싱글몰트는 시간과 자연, 장인들이 빚어낸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다. 이런 특징은 클래식 음악에서도 비슷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클래식 음악(줄여서 클래식)은 서양의 전통적인 음악장르로 중세부터 현대까지 꾸준하게 발전해오고 있다. 싱글몰트로써 가져야 하는 필수요건이 있는 것처럼 클래식도 형식적인 구조와 규칙이 중요하다.
특히 엄격한 교회음악이 주를 이루던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나 바로크 시기에는 화성학과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규칙이 클래식 발전에 필수적 요건이었다.
이를 통해 클래식은 복잡한 구조와 형식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또한 클래식이 즉흥성을 배제하고 악보에 기반하여 세부적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점 또한 싱글몰트가 만들어지는 규칙적 특성과 비슷하다.
싱글몰트가 각 지역의 테루아를 잘 보여주는 것처럼 클래식도 각 지역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스카치 싱글몰트가 하이랜드나 스페이사이드, 아일라 등, 그 지역 물의 미네랄 성분과 이탄(Peat)의 향취유무가 많은 특징들을 결정하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 또한 지역과 역사, 민족적 감수성에 따라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국민악파가 등장하는 19세기말 더욱 짙어지는데, 차이코프스키나 드보르작 같은 슬라브 계통 음악가들의 작품을 들어보면 그들 민족의 굴곡진 삶처럼 감정의 폭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드뷔시와 라벨 등 인상주의 느낌이 강한 프렌치 음악, 웅장한 자연을 표현하는 북유럽, 전통을 추구하는 비엔나, 화려함과 다이내믹한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 등 클래식은 그 지역의 다양한 개성과 맛을 느끼게 해주는 싱글몰트의 특징과도 유사하다.
이런 시간이 선사하는 깊이와 다양성 그리고 애호가들의 존재는 전통을 중시하는 싱글몰트와 클래식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개 이상의 위스키를 섞어서 만든 위스키이다.
초창기 위스키는 과학적 측정법이 없었기 때문에 품질이 일정치 않았다. 이후 19세기초 바솔로뮤 사익스 (Bartholomew Sikes)가 만든 알코올함량 측정계를 사용하여 품질을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기술적인 한계 또한 존재하였다.
그래서 위스키업자들은 품질을 좀 더 일정하게 하고 부드러우며 대중적인 맛을 유지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바로 다른 원주와의 블렌딩이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블렌디드 위스키라 하면 보통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옥수수나 다른 곡물)의 혼합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초창기 블렌디드 위스키는 몰트 위스키만의 조합이었다.
물론 이런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또는 퓨어 몰트(Pure Malt)라고도 부르는 이 조합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최초의 블렌더(조합기술자)는 1853년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의 에든버러 판매자인 Andrew Usher였다. 이후 위스키들과의 블렌딩은 발전하였지만 그레인위스키와의 조합은 당시 세관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1860년대가 되어서야 법적 제재가 풀어졌다.
개성 강한 싱글몰트보다 다양한 조합방법으로 대중적이고 친숙하게 다가가는 블렌디드는 클래식음악을 베이스로 하는 크로스오버 음악(이하 크로스오버)과 여러 유사점이 있다.
먼저 블렌디드 위스키는 키 몰트(Key Malt)를 갖고 있는데 이는 바로 베이스가 되는 원주로 전체적인 맛과 향을 지배하는 메인 원액이다.
블렌디드로 널리 알려진 시바스 리갈이나 로열 살루트는 스트라스아일라(Strathisla)를, 조니 워커는 카듀(Cardhu)를, 밸런타인은 글렌버기, 밀튼더프, 글렌토커스 같은 증류소 원액을 키 몰트로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크로스오버 또한 다양한 클래식 음악을 베이스로 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을 혼합하여 새로운 색채를 만들어 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첼리스트 요요마와 바비 맥퍼린이 함께 음반을 작업하거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락밴드 스콜피온이 함께 공연을 하는 것 등이 크로스오버에 해당된다.
이런 크로스오버 음악을 만드는 작업에는 섬세한 큐레이션이 필요하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무작위로 원액들을 섞는 것이 아닌 각각의 위스키가 가진 풍미와 맛, 향 등을 면밀히 분석하고 서로의 장점이 극대화되도록 순서와 비율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크로스오버음악도 그러하다.
서로의 장르에 대한 이해가 우선된 다음 각각의 장점이 드러나도록 섬세한 계획이 필요하다.
클래식의 형식적인 부분이 재즈의 즉흥성을 저해하지 않는다거나, 락(Rock) 음악의 강렬함이 오케스트라의 웅장함과 잘 대비되도록 만드는 과정은 모두 섬세한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개별적 요소의 독립성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 그리고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혁신과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는 부분은 블렌디드와 크로스 오버가 가진 공통된 특성이다.
싱글몰트와 클래식이 추구하는 세계는 한마디로 전통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싱글몰트는 오랜 시간 전수된 제조방식을 고수하고 테루아 즉 지역적 환경을 중요시 여긴다.
인위적 개입 없이 최소 3년에서 수십 년에 이르는 기다림의 미학 속에 장인정신과 함께 탄생한 싱글몰트는 고유한 정체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다.
클래식 또한 수백 년간 등장했던 음악들 가운데 살아남아 재해석과 재탄생되는 기다림의 미학을 갖고 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 거장의 작품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연주자들 또한 악보에 담긴 그들의 영혼을 충실히 표현하려 노력한다.
빠름보다는 느림을, 효율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싱글몰트와 클래식의 가치관은 증류소의 철학과 작곡가의 개성을 통해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즉 장인정신을 통한 인내와 기다림, 결과물이 주는 깊이와 감동의 시간이 싱글몰트와 클래식의 전통적 세계관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싱글몰트와 클래식이 전통적 가치관을 추구한다면 블렌디드와 크로스오버는 진보적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진보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전통적인 싱글몰트의 개성을 뛰어넘어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대중적이고 품격 있는 맛을 보여주는 것처럼 크로스오버 또한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창조적인 시도를 통해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융합의 미학을 갖고 있다.
이 둘의 진보적 세계관에는 몇 가지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 서로 다름을 결합하여 조화롭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융합의 미학과 서로 다른 원액과 장르를 넘나드는 유연함과 개방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포용적이고 접근 용이한 대중성, 전통과 현대적 요소의 가교역할 또한 블렌디드와 크로스오버가 갖는 공통된 가치관이다. 결론적으로 이들 진보적 세계관은 혁신과 확장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싱글몰트와 블렌디드 그리고 클래식과 크로스오버의 가치관을 요약하면 전통과 혁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보수와 진보적 세계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보통 블렌디드와 크로스오버는 가성비에, 싱글몰트와 클래식은 가치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이 둘은 현대에 와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고 있다. 전통적 세계관의 안정성과 진보적 세계관의 창조성이 함께할 때 두 분야 모두 균형 잡힌 발전을 이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이고 싱글몰트와 블렌디드 그리고 클래식과 크로스오버가 우리에게 보내주는 메시지와도 같다.
미국의 사회심리 학자이자 뉴욕대 교수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는 그의 저서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시대 중요한 문제들은 모두 옳음과 옳음의 싸움이 될 것이다” 서로가 옳음을 주장하는 순간 그만큼 이해의 폭은 줄어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틀림을 찾기보다 같음을 찾아 나아가야 하는 시대로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고 있다.
클래식 기반의 크로스오버 음반들을 추천드리겠다.
먼저 널리 알려진 첼리스트 요요마와 보컬리스트 바비 맥퍼린의 협업 앨범인 Hush를 추천드린다. 요요마 특유의 낙천성과 바비 맥퍼린의 즉흥성이 만나 자유로움과 유머러스한 감성을 보여준다.
베를린필하모닉 12명의 첼리스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합주음반을 선보이고 있다. 영화음악과 상송 등 여러 장르의 레코딩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비틀즈의 곡들을 녹음한 음반을 좋아한다.
영화 파가니니의 바이올리스트 데이비드 가렛은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유명하다. 이제 클래식 음악계를 떠난 듯 보이는 그는 다양한 크로스오버 공연을 통해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OST에 세계적인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참여했다. 그녀의 크로스오버 음반 < Dark Hope >은 주목할 만하다.
강한 타건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크로아티아 출신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Maksim Mrvica)의 크로스오버 음반들 또한 추천드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IRb8oOjij3o
https://www.youtube.com/watch?v=-1TRVUVJ-0s&list=PLdz_kjHdXHbHqnucpWH4UtdGvMlSfHtQ6&index=1
https://www.youtube.com/watch?v=85G64vht4v8&list=PLdz_kjHdXHbHqnucpWH4UtdGvMlSfHtQ6&index=2
https://www.youtube.com/watch?v=YoycNjZ2MwE
https://www.youtube.com/watch?v=0G2joT2kEzU
https://www.youtube.com/watch?v=AfuMFHB80HE&list=RDAfuMFHB80HE&start_radio=1
https://www.youtube.com/watch?v=dRuzMkD_T7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