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은 흑역사
"머리를 어떻게 해 드릴까요?"
머리 손질을 하러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가 묻는다. 고객의 의중을 묻는 것은 당연한데 막상 그렇게 물으면 난감하다. 내 머리인데도 어떤 스타일이 내게 어울리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니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할 길이 없다.
"손질하기 쉬우면서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로, 너무 튀지 않게 알아서 해주세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어떻게 해주라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미용사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가 보다.
머리 손질을 하는 동안 깜박 졸았다.
"다 되었어요."라는 말에 눈을 뜨고 거울을 봤다.
"어머, 잘 어울리네요!"라는 미용사의 입발림에도 너무 낯설다.
그러니 한번 머리 손질을 하고 오면 파마가 다 풀리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치렁치렁하여 질끈 묶고 다니게 될 때까지 미용실과 담쌓고 산다.
미용실에 잘 안 가는 이유가 또 있다.
아이 둘 낳고 난 이후 머리카락이 부쩍 빠졌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머리숱이 점점 줄어들어 거울을 비춰보면 정수리가 휑뎅그렁해서다.
학창 시절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의 흔적인지 가마의 소용돌이 아래쪽으로 삐뚤삐뚤하게 뒷가르마까지 나 있다.
"어머! 머리숱이 없네요?"
미용사가 내 머리카락을 들추면서 물뿌리개로 쉭쉭! 뿌리며 어김없이 한마디 한다.
"네. 그랑께 생머리로 기르고 싶은디도 못 길러요."
오늘은 듣지 않았으면 했는데, 기어이 내 아킬레스건을 건들고 만다.
"머리숱이 진짜 없네요잉!"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사뭇 헤집어 놓으면서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눈길이 안됐다는 표정이다.
'아, 진짜! 내 머리숱 없는 거 다 안당께.'
"네! 간 데마다 머리숱이 없다고 꼭 한마디씩 하더라고요."
머리숱이 없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내가 갔던 미용실에 다시 안 가는 이유다.
"어머나! 뒤통수 쪽에는 아예 없네요!"
아으! 아예 내 치명적인 약점을 후벼 판다. 가운을 벗어 던지고 일어서 버릴 뻔했다.
이쯤 되면 미용사도 실수한 거다. 머리숱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파마 약도 덜 들어갈 것인데 이 미용실에 다시 오나 봐라. 단골이 될 뻔한 손님 한 명 놓친 것이다.
뭔 스타일로 하는 중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번개 맞은 형상을 하고 앉아 잡지에 코를 박고 있던 여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얼마나 공짜를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졌을까, 궁금한 듯하다.
'그래, 나 공짜 좋아해서 머리 빠지고 뒤통수도 휑한 거 다 안다.'
내 머리숱에 대해서 제발 언급을 안 했으면 했는데, 1절만 하지 기어이 3절까지 해서 날 빈정 상하게 하고 기어이 미용실 순회를 하게 만든다.
그래봤자 미용실을 1년에 서너 번 가면 많이 가는 것이긴 하다.
워낙 머리숱이 적고 모발이 가늘어서 1시간 30분가량 파마해도 일주일만 지나면 파마기가 거의 풀려 부스스한 바람에 "니, 파마해야 쓰겄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파마를 하러 미용실에 가면 "내 머리가 파마는 잘 나오는데 일주일도 못 가서 그냥 풀려 버리네요!"라고 미리 얘기를 한다.
"좀 더 오래가게 할 수 없을까요?"
한마디 더 했다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최악의 파마를 한 적이 있다.
창환이 엄마가 엄마의 곗돈을 떼어먹고 밤 봇짐을 싸기 전, 강진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미용실을 할 때다. 고교 졸업 후 처음 맞은 추석 전날, 엄마의 손에 이끌려 그 미용실에 갔다. 창환이 엄마가 파마기가 얼른 안 풀리게 해준다고 네 시간 걸려서 파마를 해주었다. (창환이 엄마를 유독 진한 글씨로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 엄마의 겟돈을 떼먹고 도망 간 데에 대한 소심한 표현이다.)
파마 약을 듬뿍 바르고 머리 마는 도구도 제일 가는 걸로 머리카락을 어찌나 팽팽하게 쭉쭉 잡아당겨 가면서 마는지 생 눈물이 날 정도였다.
파마를 말고 기다리는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렵던지······.
끝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벌서다시피 한 후에 물로 헹구고 거울을 보다가 하마터면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창환이 엄마가 어찌나 파마 약을 독하게 쓰고 시간을 많이 잡았는지 귀 뒤쪽이 짓물러져 있었다. 이마엔 자동차 타이어가 진흙 길을 지나간 것처럼 깊게 패이고 울퉁불퉁 올라온 자국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또 어찌나 곱슬거리는지, 모근까지 꾸불꾸불해서 잔뜩 부풀어 오른 머리는 울창한 숲을 연상케 했다.
다음 날, 고교 동창 모임인 반창회에 가려는데 하필 미용실이 쉬는 날이었다. 집에서 드라이기로 어떻게든 달래볼까 했지만 너무 빠글거리고 부풀어 오른 머리를 도저히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물을 좀 뿌리고 머리핀으로 어떻게든 누르고 나가긴 했는데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사진을 봤더니 물기가 마르고 다시 부풀어 오른 머리가 완전히 '웃찾사'의 개그맨 윤택의 머리다.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윤택의 머리를 보면 그때의 꼬시랑 머리가 떠오른다. 작년에 암태도에 갔을 때 벽에 그려진 할머니 사진을 봤을 때 몇십 년 묵은 그 꼬시랑 머리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같이 찍은 친구들의 집집마다 아직도 산발 머리의 내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어찌나 아찔한지······.
할 수만 있다면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사진을 전부 회수하고 싶다.
얘들아~! 그 사진 무효로 하고 우리 사진 다시 찍으면 안 될까? 제발 폐기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