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여 동안 생활의 터전이었던 점방 건물이 경매로 넘어간 후, 잔여 보증금과 권리금을 떼이고 지금의 점방으로 옮겼다.
다들 장사할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말렸던 곳이라 마음을 비우고 왔지만 실제로 이전 점방보다 고생은 더 하면서도 매출이나 마진이 형편없으니 흥이 나질 않는다.
이전 점방은 에어커튼의 틈 사이로 나오는 냉기만으로 여름나기에 충분했는데 새로 옮긴 점방은 전면 유리를 투과한 햇살이 오후 늦게까지 점방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웠다. 포스용 컴퓨터 본체와 CCTV용 본체에서 나오는 열기는 한겨울에나 절실할 스팀 수준이고, 계산대 바로 앞의 아이스크림 통 두 대의 환풍기를 통해 나오는 열기 역시 점방 안을 후덥지근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계산대 뒤쪽의 유리를 투과한 햇살은, 어린 날 돋보기로 햇빛을 반사시켰을 때 콩알만해진 태양이 손바닥 위를 너울거리는 자리가 무척 뜨거웠던 기억을 상기시키며 내 등을 몹시 화끈거리게 했다. 해가 진 후에도 화끈거리는 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아 살갗이 벗겨진 건 아닌지 거울에 비춰봤을 정도다.
해도 해도 너무한 열기가 9월의 문턱을 넘었어도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사라도 잘 되면 이깟 더위쯤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마는, 점방에 들어서는 사람들마다 뭔 날씨가 이리도 더운지 모르겠다고 푸념하였다. 나는 "덥다!"라고 말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점방 맞은 편에는 편의점이 있고, 골목을 조금만 내려가면 대형 매장인 홈플러스가 있다. 가까운 곳에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점방은 여러 갈래로 나뉜 골목마다 몇 걸음 안 걸어 점방인 동네의 제일 후미진 자리에 뒤늦게 합세하여, 아파트 정문 쪽에 있는 두 군데의 점방에 삐져서 안 가는 사람들이나 겨우 이삭줍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모든 조건이 열악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진은 최소로 보고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마음을 다지는데 때론 그 다짐이 여지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다른 점방보다 싸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마진을 안 보고 파는 제품만 골라 카드로 결제하고 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소규모 점방에서 싸게 파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홈플러스와 가격 비교를 하며 싸네, 비싸네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점방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맨 소주나 막걸리를 냉수 마시듯 들이켜고 가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길을 가다 갈증이 심하여 어쩌다 한번 드시고 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인근 아파트 노인정 어르신들이 번갈아 가며 하루에 몇 차례 사랑방 드나들듯 점방에 쪼그리고 앉아 술판을 벌이니 무척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손님들의 눈도 있고, 점방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므로 여기에서 술을 드시면 안 된다고 양해 말씀을 드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차라리 술 한 병 사서 시야가 툭 터진 공원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에 앉아 알싸하게 온몸에 퍼지는 술기운을 느끼며 음미하듯 홀짝거려도 좋으련만, 왜 스스로를 궁상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술을 좋아하셨다. 일하시다 갈증이 나시면 그 어르신들처럼 인근 점방에서 술 한 병 사 드셨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르신들께 술은 드시되 제품에 얼룩이 튀지 않게 조심해주고 편하게 드시고 가시라 했다. 그런데 진열해놓은 음료 세트나 과자 박스 위 등 아무 데에나 술판을 벌였고, 가고 난 자리엔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주변은 술이 튄 자국으로 얼룩졌다.
소주 한 병에 천 원이라 인근 점방보다 100원이라도 싸니까 한 걸음 더 걸어 우리 점방에 왔겠지만 종이컵 두세 개는 살 수 있는 50원도 아까워서 몇 날 며칠 이 사람 저 사람이 따라 마시고 놔뒀던 컵에 아무 거리낌 없이 또 부어 마신다.
마시다 둔 종이컵에 이름을 써 붙여두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타액이 손자국과 먼지에 범벅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컵이 못 쓰겠다며 이의를 달면 "알콜로 소독해분께 암시랑 안 해."라고 하면서 손으로 쓰윽 문지른 후 그대로 따라 홀짝 마신다. 그러다 컵이 정 추접스럽게 느껴질 즈음이면 카운터에 와서 종이컵을 서비스로 달라고 한다.
어쩌다 100원짜리 누네띠네 하나를 사서 서너 명이 나눠 안주로 삼기도 한다. 머리가 홀랑 벗겨진 한 영감님이 합석한 날에는 100원짜리 누네띠네도 안 팔린다. 그 영감님은 항상 호주머니에 볶은 콩 몇 알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딱 한 알씩 나눠주면 일행은 군말 없이 받아 들고 조금씩 안주로 쪼개 먹는다.
우리네 인심이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속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몸소 실천하고, 실제로 콩 한쪽이 술 한 병 마실 안주가 되는 걸 처음 봤을 땐 입이 쩍 벌어졌는데 지금은 으레 있는 광경이라 그러려니 한다.
또 어떤 영감님은 튀김 한 봉지를 안주로 싸들고 와서 술판을 벌인 후, 손에 묻은 기름기를 진열해놓은 20kg 쌀포대에다 아주 자연스럽게 닦아버렸다.
한동안 창고에 있는 물량을 소진하려고 황도를 한시적으로 원가 이하인 1,000원에 팔았었는데 술안주 하기 딱 좋다며 바닥에 국물을 질질 흘려 놓아 어찌나 찐득찐득거렸는지,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애를 먹기도 하였다.
나이 들어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이 술 한잔 마시는 낙으로 노년을 즐기는 것까지 뭐라 하겠는가마는 왜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스스로의 값어치를 추락시키는가.
기본적인 매너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는 어르신들과 새로 옮긴 동네의 썰렁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된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점방은 어쩌고······'라며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을 늘어놓던 영감님이 웬일로 그제는 왕사탕을 주더니 어제는 마시고 난 술병을 쓰레기통에 손수 버리고 산에서 주워왔다며 날밤 한 개를 주셨다.
일자로 꾹 다문 입술과 얼굴에 고랑진 주름이 '나, 한 성깔!'이라고 써 붙여놓은 듯한 영감님이다. 실제로 심보가 아주 고약스러워서 "그렇게 아무 데에나 술병을 놓으시면 안 돼요."라고 하면 술맛 떨어지게 한다고 얼굴에 핏대를 세웠다. 제발 그 영감님이 점방에 안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는데 기본적인 매너를 보이고 한결 느슨해진 표정으로 뇌물(?)까지 덤으로 주시는 걸 보면서 어떤 사람이라도 선입견을 갖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면 소통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직은 모든 면에서 이전 점방과 비교하게 되고, 점방을 찾는 고객들 역시 우리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다른 점방과 가격이나 서비스, 친절도 등을 비교하며 신뢰할 만한 점방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객 한 분 한 분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신뢰를 쌓아가다 보면 차츰 단골 고객이 많이 생기고 점방 사정도 그만큼 나아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