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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Sep 23. 2022

작년 이맘때 사기친 놈

앗,  이놈이 그놈이었어

작년 이맘때 질레트 면도날을 갖고 와서 환불해달라는 놈이 있었다. 물건을 팔아먹을 때는 깍듯하게 대접을 해주면서, 환불해달라는 사람도 손님은 손님인데 왜 ‘놈’이라는 표현을 쓰느냐고 혹자는 따질지 몰라도, 그놈은 우리 점방에 들어올 때부터 ‘놈’이었다. 게다가 멀쩡한 제품을 뜯어먹고 생트집을 잡아 환불을 요구하는 손님보다 잔머리가 한 수 위인 놈이다. 


평소에 남편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듣는 말이 있다. 손님이 다소 억지를 부리는 경향이 있더라도 얼굴에 있는 티 없는 티 다 내면서 따지려 들지 말고 손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기는 어려워도 열 사람을 잃는 건 순간이라며, 손님과 실랑이를 하면 그 손님은 다시는 우리 점방에 오지 않으려 할 것이고, 안 좋은 이미지로 소문이 나면 잘잘못을 떠나서 무조건 손해이기 때문이다. 


융통성이 없는 나는 손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남편의 말을 실천한답시고 그놈한테 한마디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산대에 찍힌 판매 금액 16,000원을 그대로, 그것도 아주 흔쾌히 환불해주면서 친절하게 안녕히 가시라고까지 했다. 그놈은 울 점방을 나서자마자 점방 앞에 미리 대기시켜놓은 자전거를 타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길로 줄행랑을 쳤다.

센스나 순발력이 형광등인 나는 그놈을 배웅하고 나서야 그렇게 호기 있게 환불을 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왔다. 바로 전까지 계산대에 있었던 남편이 하필 창고 정리를 하러 간 지 5분도 채 안 되어 벌어진 일이다. 


그 제품이 잘 팔리는 제품이 아니었으므로 환불을 해주더라도 최소한의 절차는 거쳐야 했다. 우리 점방에서 산 게 확실한지, 샀다면 언제 샀는지를 물어보고 샀다는 날의 판매 내역을 검색했어야 하고, 그게 얼른 확인이 안 된다면 남편한테 혹시 최근에 판 적이 있는지를 물어봤어야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수록 내가 얼마나 경솔하고 안일하게 대처하였는지를 깨닫게 되자 기분이 영 꺼림칙했다.


남편한테 말해봐야 금방 달궈지는 양철 성질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였지만 혹시 또 그런 놈이 판매 여부가 불분명한 제품을 갖고 와서 사기를 칠 수 있으므로 경각심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자랑삼아(?) 얘기했다가 된통 혼났다.

남편이 CCTV를 돌려보더니 처음 보는 놈 같은데 나더러 자주 오던 놈이더냐고 하면서 자기가 외부에 나가 있을 때는 혼자 처리해도 될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전화하여 물어보더니 정작 점방에 있을 때는 왜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한다.


계산대에 있으면 항상 손님을 주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지, 해찰을 부리면 그만큼 나를 쉽게 보고 손버릇 나쁜 사람은 슬쩍 담아버린다며, 도무지 잘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안 생기니 어딜 가면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생각이 딴 데 가 있다는 찍는 소리는 덤이다.

진짜 왜 꼭 내가 계산대에 있을 때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지…….


그놈의 경우도 그렇다. 남편이 CCTV를 되돌리자 그놈이 점방 안을 기웃거리다 들어온 장면이 찍혀 있었다. 계산대에 남편이 아닌 내가 있는 걸 확인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를 어리바리하게 본 셈이고, 그놈의 판단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놈은 나한테 환불을 요구하면서 내가 어떤 대응을 할지까지 예습을 해왔을 것인데 내가 아무런 의심이나 확인도 해보지 않고 바로 환불을 해주자 룰루랄라 쾌재를 불렀을 것이고, 점방을 나서자마자 미리 대기시켜놓은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그놈이 환불을 요구한 질레트 면도날은 우리 점방에서 취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잘 안 팔리는 품목이고, 단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진열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거의 악성 재고나 마찬가지인 제품을 판매가 그대로 환불을 해줘버린 것이니 난 그놈한테 16,000원이나 주고 악성 재고품을 산 셈이다.


5년 넘게 장사를 했으면서도 손님이 환불을 해달라고 할 때 어떻게 응대해야겠다는 판단이 안 되더냐고 남편이 무척 답답해하며 조목조목 따지면서 나무랐다.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짜증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그 찜찜한 여운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오늘, 또 한 놈이 작년 이맘때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거……그저께 여기서 샀는데요, 환불해줄 수 있을까요?”

30대의, 어수룩하게 보여 좀 없어 보이는 한 남자가 두 손으로 질레트 면도날을 머뭇거리듯 내밀면서 비교적 공손하고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엊그제 저녁 무렵, 계산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진열대에 물건을 채우고 있을 때 어떤 손님이 면도날을 고르며 남편과 얘기하는 것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때 그 손님이 면도날을 사갖고 갔다가 자기 면도기와 안 맞아서 도로 갖고 온 것인 줄 알았다.

“면도기와 안 맞던가요?”

“예. 내가 쓰는 면도기와 안 맞아서요.”

“카드로 사신 건 아니죠?”

카드로 산 것은 매출 수수료가 발생하므로 환불해주기 전에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한다. 이것 역시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 현금 주고 샀어요.”

“몇 시경에 얼마에 사셨어요?”


이것저것 묻기는 하면서도 환불하러 온 놈에 대해서 어떤 의심을 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예전에 생판 처음 본 놈한테 속아서 덜컥 환불을 해줘버린 적이 있는 제품인 데다 최근에 내가 판 기억이 없어서 환불을 해주더라도 판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갖고 갔다는 날의 판매 내역을 검토해봤지만 얼른 조회가 되지 않았다. 

몇몇 손님이 계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점방에서 산 것이 확실한지 재차 확답만 듣고 그냥 환불을 해줄 참이었는데 그놈의 다음 말에 마음이 바뀌었다. 

“밤 9시 무렵에 아는 동생이 물건을 이만 얼마치인가 사면서 면도날도 같이 샀다고 하데요.”


본인이 산 것이 아니라면 덥석 환불을 해줄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다른 손님을 먼저 응대한 후 다시 판매 내역을 찬찬히 검색했다. 그날 물건을 샀다는 시간대를 전후로 아무리 살펴봐도 판매한 기록은 없었다.나와 교대를 하고 쉬고 있을 남편을 불러내기가 미안하여 잠시 망설여졌지만 예전과 같은 실수를 안 하려면 아무래도 내 임의로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남편한테 한번 물어보고요.”


내가 핸드폰 폴더를 열자 그놈이 약간 움찔하는 듯 보이는가 싶더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한 표정이 스쳤다. 그때까지도 나는 단지, 그놈이 직접 산 것이 아니라고 하여 남편한테 혹시 팔았는지를 물어보려는 것뿐이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누르자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남편이 전화를 받는 대신 점방 안쪽에 있는 사무실에서 얼른 나왔다.

“그저께 혹시 이 면도날을 판 적 있어요?”

내 말에는 묵묵부답이던 남편이 그놈을 보더니 대뜸 

"전에 면도날을 환불해간 적 있어? 없어?"라고 눈에 힘을 주고 심문하듯 물었다. 나는 남편이 내 말에는 대꾸도 안 해주고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나 싶었다.


“한 번 오……오기는 했는데 화……환불은 안 했는데요.”

그놈은 만만해 보이는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다가 점방 안쪽에서 남편이 불쑥 나오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남편의 느닷없는 추궁에 말까지 더듬거렸다.

“당신, 자전거 타고 왔제!”

“예.”


그때까지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자전거'라는 말에 작년 이맘때 나한테 사기를 치고 간 그놈이 퍼뜩 떠올랐다.

“그때도 자전거를 타고 와서 면도날을 환불받아갔잖아! 그런 적 있어? 없어?”

“집이 이……이쪽이라 여기를 자주 지나가긴 하……하는데요……면도날을 환불한 적은 어……없거든요.”

“밖에 세워둔 자전거도 그렇고, 딱 보니 그때 그놈이그마! 어디서 또 사기 치려 하고 있어? 인생 고따구로 살지 마! 긴말 필요 없고, 들어오는 단가가 11,000원인데 당신이 그때 16,000원을 받아갔으니까 얼른 차액 5,000원만 내놓고 꺼져!”

“오……오기는 했는데요……환불을 한 적은 어……없거든요.”

“뭣이 그래라우? 그때 나한테 돈으로 환불 받고 자전거 타고 내빼놓고!”

나까지 합세하여 추궁을 하였는데도 환불을 한 적이 없다고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면서 발뺌을 하였다.


“그래?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그마! 그럼 당신이 하는 말이 맞는지 경찰을 불러서 한번 시시비비를 가려볼까?”

남편이 핸드폰 폴더를 열고 버튼을 누르려는 시늉을 하자 그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이씨! 아이씨!”를 연발하더니 코를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벌벌 떠는 손으로 5,000원을 내주고 남편한테서 면도날을 돌려받자마자 자전거를 질질 끌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작년에 한탕 해먹은 후 내가 만만해 보여 또 왔거나, 한 번 왔다 간 걸 까먹고 들어왔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다. 나한테 사기 친 전적이 있는 놈인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또 당할 뻔한 나로 보면 소 뒷걸음질치다가 남편의 기억력 덕분에 그놈한테 덤터기 쓴 돈을 회수한 셈이다. 하지만 하마터면 또 당할 뻔했다 생각하니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오메! 그런 놈은 파출소에 넘겨서 혼쭐을 내주지 그냥 보내부러?"라고 분통을 터뜨리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듯이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며 행여 나 혼자 점방에 있을 때 보복을 하러 올 수도 있으므로 그놈이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둔 것이라는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그놈은 임자를 제대로 만났으면 콩밥 먹을 뻔했는데 운 좋은 줄 알기나 할까! 

아니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인 남편이 나타난 바람에다 다 된 죽에 코를 빠뜨렸다고 애통해하면서 내년 이맘때를 벼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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