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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은 Nov 08. 2024

영천 사람들

경준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아~아


"명자야~ 너네 할머니네 집차 왔다아~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긴 검은 고무줄을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찬 후 한 발씩 고무줄을 뛰어 넘었다. 무릎 높이에 걸었던 고무줄이 엉덩이에 걸리던 참이었는데.  명자는 그만 고무줄을 발로 밟았다.


"어? 집차가?"

"그래~ 빨리 가봐"


고무줄을 잡고 있던 정균이 손을 놓고 달렸다. 


"너넨 왜 따라와?"

"와~ 집차다. 집차"


대문 앞에 군용 집차 한 대와 젊은 한국군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선 정균 뒤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문이 열리고 언뜻 봐도 잘생긴 군인이 대문을 열고 나와 조수석에 올라탔다. 집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내로 향했다. 


대청마루에 놓인 종이상자와 나무 궤짝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크고 작은 깡통, 상자에 든 초콜릿, 캬라멜을 꺼내고 있었다.


"어? 소세지다! 미군 소세지!"

"드라푸스도 있어! 와아~"

"자, 자"

할머니가 드라푸스를 상자에서 꺼내 주었다.

깡통 안에는 길다란 소세지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대문 밖에 잔뜩 몰려와 있는 동네 아이들을 약올리듯 정균이도 명자, 명희는 새콤달콤한 드라푸스를 와구와구 먹었다.


"엄마, 누구야?"

"어?"

"집차 타고 온?"

"어~"

"자 이거 갖고 나가서 놀아. 자. 자. 얼른 나가"


할머니는 잡히는 대로 아이들에게 사탕을 쥐어주고 내몰려고 야단이었다.


"누군데?"

"쓰으~ 어서 나가놀래두"

"와아~ 명자야 그거 뭐야?"

"와~ 드라푸스잖아! 명자야, 명희야 나도 나도!!"

"흥, 안 돼~ 안 줄거다"

"야아~ 하나만 하나만~"

"명자야, 우리 니네 집으로 가자"

"그래, 삼촌"


할머니가 준 미제 간식으로 불룩해진 겉옷 주머니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영천 시장 뒤에 있는 명자 집으로 달렸다. 전쟁이 끝난 후 명자네는 할머니댁과 가까운 영천시장 안쪽으로 이사왔다. 

대문을 열고 대여섯 걸음 너비의 마당이 있는 아담한 집. 쫓아오는 동네 아이들을 뒤로 하고 대문을 닫았다. 

대문 밖에서 치사하다. 다신 같이 안 논다고 소리치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정균이 대청에 털썩 앉았다.

정균옆에 명자, 명희도 신발을 벗지 않고 나란히 앉았다.

불룩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나씩 꺼내 보니, 사탕, 초콜릿, 캬라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너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뭘? 삼촌?"

"아까 그 군인있잖아. 작은 누나 신랑이다"

"어?"

"그래, 둘째 누나 말이야"

"나는 이모 신랑 한 번도 못 봤는데?"

"나 들러리 안 섰는데?"

"결혼식을 안 했으니까."

예쁘장하고 끼도 많은 명희는 동네 단골 화동이다.

신랑 신부 앞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꽃잎을 뿌리며 걷는 여자 화동은 늘 명희가 하고 남자 화동은 종만이었다. 둘째 이모가 결혼할 때도, 성민의원 아들 결혼식때도 둘이 짝을 지어 화동노릇을 했다. 화동은 신랑신부에게 새 옷을 한 벌씩 얻어 입었다. 그래서 명희는 명절이 아닐 때도 일 년에 새 옷이 몇 벌씩 생겼다. 


"결혼을 안 했는데 신랑이 있다구?"

"그래. 아, 너무 달다"

정균은 마루에 벌렁 드러누웠다.


며칠 전 정균은 엄마, 아버지가 한 밤중에 다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마할년. 그렇게 싸돌아 다닐 때부터 내 이럴까봐. 허 참"

"신랑이 인사하러 온다니까요"

"창피하게"

"싫다 좋다 하지 말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뭐? 그렇게 싸고 돌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디 지 마음대로!"

"아휴 참. 이미 저질러진 걸 어쩌겠수?"


정균의 둘째 누나 영순은 활달한 성격에 외모도 화려했다.  짧게 잘라 파마한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뽀얀 얼굴에 분을 바르며 치장하는 모습을 명자, 명희는 마루에서 턱을 괴고 바라봤다.


"이리 와봐"

영순이 장난스럽게 연지로 아이들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자, 거울 봐봐"


"훗, 이쁘다"

작은 입술이 빨간 앵두같이 변한 것을 보고 명자가 헤벌쭉 웃었다.

"나도 나도"

명희가 입술을 오므려서 뾰족하게 내밀었다. 


떡을 좋아해서 떡봉이란 별명이 붙은 영순 이모는 하얗고 뽀얀 설기떡처럼 예뻤다. 자잘한 꽃무늬 저고리에 들꽃색 통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둘둘 말아 단정하게 올린 엄마와 달리 영순이모는 밝은 연두색이나 다홍색 치마에 별처럼 반짝이는 저고리를 받쳐 입었다. 눈썹도 그리고 입술에 연지도 바르며 단장하느라 이모 방에서는 늘 달콤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작은 손가방을 들고 또각또각 소리나는 삐딱구두를 신고 외출을 했다. 


이모 신랑이 이모부란 건 알지만. 

미군도 아닌데 왜 미제 물건을 갖고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정균은 하늘만 보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정균은 학교 끝나면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명자네 와서 놀다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올라갔다.


물에 삶아서 따뜻한 소세지 하나를 명자는 이빨로 조금씩 잘라 아껴 먹었다.

"삼촌은 좋겠다. 소세지 많이 먹어서"

"아닌데. 나 누나네 와야 소세지 먹을 수 있어"

"왜? 할머니네 소세지 많잖아"

"엄마는 소세지 안 삶아줘"


잘생긴 군인이 타고온 집차는 두 어번 더 할머니 집 앞에 왔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달콤한 꽃냄새가 나는 방에 영순이 돌아왔다. 정균은 조카들에게 영순이 집으로 돌아 온 후로 할아버지가 화를 내고, 할머니가 우는 날이 많다고 얘기했다. 


발칵, 

방문 열리는 소리에 화단에서 소꼽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앞마당으로 조르르 나왔다.

영순이 삐딱구두가 아닌 고무신에 발을 넣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소꼽놀이"

"이모랑 저기 산에 가자"

"네~"

햇볕이 점점 따뜻해지는 계절이었다. 인왕산에 복사꽃이 진한 선분홍색을 여기저기 피우고 띄었다.

산 어디쯤에서 걸음을 멈춘 영순이 삐죽삐죽 자란 잡초를 뽑았다. 

잡초를 뽑자 흙은 조금 쌓아둔 것 같은 작은 봉분이 드러났다. 그 앞에 초콜릿, 사탕을 늘어놓고 영순이 가만히 앉았다. 


영순의 뽀얀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경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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