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재흘수

동서울 터미널

by 은의 정원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시골에 갔다.

처음 고속버스를 타던 순간이 아직도 어릿하게 떠오른다.

축축하고 까맣게 때가 탄 시멘트 바닥, 담배냄새와 매연 냄새로 숨이 막히는 대합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바쁘게 지나가는 틈 안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몸을 붙여 걸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버스 중 아빠가 어서 타라고 한 버스는 계단이 너무 높아 손잡이를 잡고 힘겹게 올라갔다.


'아빠는 이 많은 버스 중에서 우리가 타야할 버스를 어떻게 찾았을까?'

퀘퀘한 냄새가 나는 빨간 비닐 시트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웠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채우고서야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저녁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잠도 덜 깬 채로 집을 나섰다. 엄마가 가방에서 꺼낸 이런저런 요기거리들을 한 입 먹을 때에 맞춰 버스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다란 몸이 부드럽게 곡선을 틀어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면 나는 마치 투명한 고래의 몸 안에 앉아 있는것만 같았다. 터미널에는 아직도 출발 시간을 기다린 채 늘어서 있는 버스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머리를 들이밀던 버스가 한강을 건너는 순간이 나는 가장 좋았다.

어른 키보다도 한참이나 높은 버스에 올라 앉아 달리는 자동차를 내려다 보고 한강의 반짝이는 윤슬을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그 순간의 설레임과 기쁨은 목적지가 어디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버스에는 우리 가족과 몇 명만이 타고 있었다. 버스에 좌석번호가 있었겠지만 아무 자리나 옮겨 앉아도 괜찮을 만큼 한산했다.

창문을 열 수 있는 맨 뒷자리.

매연 가득한 서울을 빠져나와 막힘없이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 안으로 빨려 들어갈듯 눈을 감고 그것을 만끽했다.

아무런 소리도, 생각도 없는 바람 속에서 온전히 바람을 맞고 있는 나란 존재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언제까지 가?"

"응 조금 있으면 휴게소 나와. 거기서 우동 먹자"


아침에 탄 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할 즘은 점심때였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점심으로 면발 굵은 우동을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것도 즐거웠다.


"자 이제부터는 한숨 자. 자면 멀미도 안하고 우리 또 한참 가야 돼"


아기때도 낮잠을 안 잤는데 국민학생더러 버스에서 자라니?

난 바람 맞으면서 안 잘거야.


어른들이 무언가를 시킬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경험한 삶의 지혜에 거스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아이도 후회할만한 경험을 해 보아야만 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는 곧 후회했다.

온 사방 풍경이 산 속에 갇힌 듯 거대한 가리개 같은 산이 겹겹이 나타났다. 귀가 멍멍해지고 쌩쌩 달리던 고속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구불 구불하게 산길을 올라갔다.

엔진의 힘이 부족해서 뒤로 미끄러지면 어쩌지? 창 밖은 드넓게 펼쳐져있던 논과 밭에서 골짜기와 낭떠러지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라도 잠을 청해 보자. 귀가 멍멍하고 울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고 숨소리에 집중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자,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휴~ 다행이다"

"자, 우리도 잠깐 내려서 바람쐬고 오자"

힘겹게 올라온 산의 정상. 이제는 더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가장자리로 추락 방지를 위한 안전봉이 군데 군데 박혀 있었다.


"와~ 우리 이렇게 많이 올라왔어"


"아흔 아홉 고개야. 내려가면서 세어 봐. 몇 번 구부러지는지"


그딴 걸 왜 세라고? 칠십오, 칠십.....육...

나는 그들의 장난기를 원망했다.

숫자를 세느라 잠도 못하고 그래서 멀미만 하고. 여기서 내려만 준다면.... 제발..


버스는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오장육부를 뒤흔들며 험한 고개를 내려갔다.

바싹 마른 버스 기사의 뒷모습은 단단하고 거대한 버스와 한 몸인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오직 그만이 속이 뒤틀리는 40분 거리의 굽이진 길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왔다.

꼬불꼬불한 길이 끝났어도 멀미의 여운은 오래갔다. 당장에라도 차에서 내려서 땅바닥에 앉고 싶었지만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려 낮은 건물이 좁은 도로 양 옆으로 늘어선 거리를 지나 시멘트 벽에 지붕만 덩그러니 얹은 듯한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