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디폴트값은 아마도 우울인 거 같아"
함박눈 내리는 새벽
맥주잔을 막 비우고 친구는 말했다.
그녀는 나와 19년째 친구고,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내 세포에는 우울이 존재하는 거 같아.
이미 나의 일부라 떼어지지가 않아"라고.
또 한 번 영원할 거 같던 사랑이 끝나고
긴긴밤을 잘 새우다 여러 밤을 그러다
공들였던 마음이 전부 무너질 거 같은
위태로운 밤
왜 그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 걸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가정사,
극단적이었던 나의 과거,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버린 트라우마.
이상형이 '대가리 꽃밭에 밝은 여자'였던 그는
아마 영영 나를 그리워하지 않겠지.
분명 그녀가 한 말인데,
내가 말한 것도 같다.
자꾸 내 목소리로 울린다.
"내 디폴트값은 아무래도 우울이야"
그리고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은,
그리고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근데 뭐 어쩌겠어"다.
너는 이따금 우울하지.
또 너는 강하고, 예쁘고, 좋은 차를 몰고,
100평짜리 운동센터를 운영하는 잘 나가는 사장님이고, 아주 귀여운 강아지를 키우고 있지.
또 너의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고, 넌 친화력이 아주 좋고, 또 너는 결국 여기까지 왔지. 여기까지 왔지. 꼭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지.
사람은 입체적이라서 다양한 면이 있어.
나는 그런 너의 많은 면들을 정말 사랑해.
어쩌면 내가 안을 수 없는 너의 우울까지도.
그래! 나는 다음 사랑이 와도
아픔과 과거 전부를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기쁨도 행복도 공유하겠다.
잠이 온다.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