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8년 전, 이맘때도 거리에 있었다. 매주 토요일 서울행 기차와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는 특별함이 아니었다.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당연히 나서야 했기에 주저 없이 촛불을 들었다. 80년대 말 시민 항쟁 때도 거리에 있었고, 90년 중반 12.12군사 반란의 주역들을 처벌하기 위한 시위 때도 거리를 누볐다. 불의와 부정에 당연히 일어서야 한다고 배웠고 행동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은 거창할지 모르지만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80년 5월 어느 날, 교정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온갖 꽃들이 만발했다. 교실에서 한 친구가 계속 울고 있었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 끌고 가며 죽이고 있는 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오빠가 연락이 안돼 운다고 했다. 며칠 후 그 친구의 울음은 멈췄다. 오빠가 걸어서 걸어서 일주일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친구와는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해 5월,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도륙 당했다. 단지 권력의 야욕에 사로잡힌 무리들의 비상계엄 발동과 계엄 해제 요구에 대한 진압의 희생양으로.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발동이라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과 기억들이 떠올라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천만다행으로 빠른 시간에 계엄이 해제되었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7년 전 봄, 거리에서 촛불을 내려놓은 마지막 날!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이젠 올 수 없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차마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토요일(7일)에 서울로 가야 했다. 바로 차표를 알아봤다. 버스와 열차는 거의 매진이었다. 6일 새벽, 입석이었지만 간신히 열차표를 구했다. 용산행 KTX.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다. 다시 거리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추위를 대비해 단단히 무장했다. 기차역에 차를 세워두고 열차를 탔다. 용산역에 내려 여의도로 가려는 데 국회의사당 주변 지하철역은 무정차 통과라고 알려준다. 여의나루역에 내려 30분을 걸어 국회의사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주 무대 쪽으로 향했다. 모든 도로는 민주시민들로 가득 찼다. 드높은 함성과 결연한 눈빛들은 마음속 항쟁의 깃발을 우뚝 솟게 했다. 20~30 젊은 청년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누가 이 청춘들을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내 몰았나?
결국 탄핵안은 정족수 부족으로 표결이 무산되며 부결됐다. 민주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순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국민을 대표해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이 오직 자신들의 안위와 야욕만을 앞세운 파렴치한 선택의 결과였다. 내란 동조자들이 명확해졌다.
매주 토요일, 여의도로 간다. 끝날 때까지 꺼져서는 안 되는 촛불을 위해, 하나의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될 때까지 함께 해야 한다. 매서운 추위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몇 백 km의 거리쯤이야 무슨 문제랴.
뜨거운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있는 그곳에 있어야만 난 자유다. 민주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다.
다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는 거리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