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만난 사람들-7]
16년 전이다. 거침없이 내려왔다.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딱 한 가지.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여러 이유가 눈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아내와 아들, 딸이 곁에 있어 살아 낼 힘과 용기를 얻었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좌충우돌 지나 온 시간들이 엊그제 같다. 이룬 것과 잃은 것을 저울질하면 이룬 게 더 많다. 아직 멀었지만 이만큼도 다행이다.
가족들이 내려오기 전 먼저 와서 빈집을 수리했다. 목수인 동서와 함께 오래 비워 두었던 집을 대대적으로 고쳐 나갔다. 일은 동서가 다 하고 나는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다. 아는 사람도 아는 곳도 없는 막막한 상황. 필요한 공구와 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읍내로 갔다. 철물점 간판만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집수리하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수시로 드나들며 사장님과 안면을 텄다. 한눈에 초보 귀농인임을 알아보셨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던 나는 생소한 용어들 앞에서 버벅 거렸지만 사장님은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사장님은 그렇게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분이었다.
타향살이에서 믿고 의지할 누군가를 만난 다는 건 큰 행운이다. 사장님은 무엇이든 물어보고 부탁해도 되는 듬직한 배경이 되어 주셨다. 귀농 초, 닭을 키우기 위한 계사를 짓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야 했다. 다른 농장의 구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건축이었다. 까다로운 공정을 매끄럽게 처리해 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셨다. 사장님의 소개였기에 전화 한 통으로 믿고 맡겼다. 그들의 일 처리는 군더더기 없었다. 깔끔하고 명료했다. 빠르고 정확했다. 1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계사는 흠결 없이 견고하고 멋지다.
학생들이 문구점에 가는 것처럼 어른들은 철물점에 간다. 아내도 철물점에만 가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석구석 신나게 훑고 다닌다. 철물점에는 없는 게 없다. 못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세상 모든 작업의 쓰임새와 규격에 맞게 만들어진 공구와 자재들이 넘쳐난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그 하나하나의 용도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능력이다. 사장님은 각종 설비 일도 하고 있다. 사장님이 일을 나가시면 철물점은 사모님이 지키신다. 사모님은 조그만 물건을 하나 구입해도 가게 문밖까지 나와 인사를 하신다.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배웅해 주신다. 늘 한결같다.
오만가지 물건이 있는 철물점이 몇 군데 있지만 사람을 부르는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장님의 과거 이력은 화려하다. 성인 되어 처음 시작한 일은 가구점 점원이었다. 급여는 없었다. 신발 한 켤레만 얻어 신고 일했다. 6개월 후 받은 월급이 2천5백 원이었다. 그곳에서 목공을 배웠다.
튀김 닭집을 운영했다. 튀김닭을 잔칫상에 올리던 시절이었다. 관광버스에도 필수 메뉴였다. 장사가 잘됐다. 장사의 맛을 알았지만 심야 영업 금지가 시행되면서 타격을 입었다. 미련 없이 그만뒀다.
다시 몇 년 간 택시와 영업용 화물차를 운전하다 카센터를 열었다. 공구의 쓰임새와 수리의 기본을 배웠다.
모래와 흙, 벽돌 등을 판매하는 골재 장사를 하면서 굴착기 면허를 취득했다. 굴착기 일을 하는 동안 기회가 생겨 철물점을 인수했다. 굴착기 일과 철물점 운영을 병행했다. 그 사이에 열관리 시공업 자격을 취득했다.
긴 세월 동안 다양하고 많은 일을 섭렵했다. 어느 일도 만만한 건 없었다. 쉽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좌절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오늘을 위한 과정이었다.
예전의 인기 드라마 맥가이버의 주인공처럼 사장님은 무엇이든 척척해낸다. 부탁하면 모두 들어주시고 맡겨 놓으면 알아서 처리해 주신다.
보일러를 설치해달라고 하면 척척, 수도 배관을 놓아 달라고 해도 척척, 펌프를 설치해 달라고 해도 척척, 물 빠짐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배수로를 묻어달라고 해도 척척,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고 해도 척척, 타일 시공을 부탁드려도 척척, 전기를 연결해 달라고 해도 척척, 지역의 맛집을 물어봐도 척척, 심지어 선거나 기관의 대표를 뽑기 위한 인물평을 물어봐도 거침없이 척척!
척척박사 사장님의 존재는 든든한 울타리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사이고 알아도 알아도 모르는 것 투성이가 시골살이다. 조용히 살고자 해도 그럴 수 없음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끼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사람이다. 사장님은 내게 그런 분이다. 긴급을 요할 때 언제든 달려오고,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 명쾌한 해답을 준다. 어떤 고장이나 문제가 발생해도 곤란하다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건 사장님 덕분이다. 어지간한 일들은 그냥 해주시거나 최소한의 비용만을 청구하신다. 그럴수록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 드린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인연을 이어 온 척척박사 철물점 사장님께도 세월의 무게는 드리워졌다. 이젠 조금만 일해도 몸의 이곳저곳이 삐걱댄다며 힘들어하신다. 좋아하시는 삼겹살 안주에 소주 두 병 대접해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