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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그 겨울, 처연하고 쓸쓸한 침잠

강화 적석사



여행지에서 황홀한 일몰을 본다면 그 여행은 장소 불문하고 성공이다. 마침 그날이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도 된다면 일 년을 잘 보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 12월 31일이 되면 일몰을 보기 위해 떠나곤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해의 마지막 날, 지는 해를 보았던가. 


수많은 기억 속에서 먼저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는 어느 절에서의 낙조다. 일도 사랑도 모두 잡지 못한 채 벼랑 끝에 매달려 누군가 손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던 이십 대 후반, 지는 해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싶어 서쪽 바다로 갔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따뜻한 손 하나가 나를 놓아 버린 그때, 나는 나를 떠나간 모든 것들을 마지막 지는 해와 함께 놓아주고 다시 새로운 무언가에 매달릴 힘을 얻고 싶었다. 


수인선 협궤열차.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무렵, 수인선 협궤열차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아마도 소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배경으로 옛 연인과의 이야기를 그린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그 소설의 어떤 구절에 꽂혔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 기차의 반쯤 된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게 되어 있는데, 상대편 사람과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협궤열차이다.’  - 윤후명 <협궤열차> 중에서


협궤열차는 궤도 너비가 보통 열차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좁은 궤도를 지나는 작은 열차다.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 일본이 소래염전에서 난 소금과 김포, 강화 등지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개통돼 1995년까지 운행됐다. 꼬마열차라고 불리던 2량짜리 열차에는 어민들과 학생들이 주로 탔는데, 앞사람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았지만 정이 넘쳤다고 한다. 철길 건널목에서 가끔 버스나 트럭과 충돌해 열차가 넘어지는가 하면, 고개를 넘을 땐 사람들이 나와 열차를 밀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때 수인선 협궤열차에 끌린 건 어쩌면 ‘수인선’이라는 말과 ‘협궤열차’라는 단어가 주는 왠지 모를 낯설면서도 정겨운 느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에 가면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고, 그래서 그날 협궤열차가 다닌 철로가 있다는 소래포구로 향했다. 하지만 소래포구에선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소래포구의 갯벌에서 혼자 글을 쓰며 넋두리를 하는 것으로 수인선 협궤열차에 대한 열망을 다스렸다. 


참고로, 협궤열차 궤도가 있던 소래의 철교는 지금은 인도교로 바뀌었고, 안산 고잔역 근처에만 당시 협궤철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당시 운행되던 협궤열차는 소래포구의 소래역사관과 인천시립박물관, 철도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시흥, 소래, 오이도, 송도 등을 지나는 수인선도 폐선됐다가 2012년 수인선 복선 전철로 거듭났다.     



소래포구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황망해하던 나는 해 질 무렵,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찾아 급히 발길을  옮겼다. 강화도 적석사 낙조. 왜 거기에 꽂혔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곳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가야겠다는 확신이 깊어졌는지도.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혹은 책이나 신문에서 마음을 들썩이는 곳을 찾으면, 특히 그곳이 잘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라면 나는 그곳을 마음 한편에 넣어두고 어떻게든 찾아가곤 했다. 


적석사는 당시 강화도에서도 그리 유명한 절이 아니었다. 봄철 진달래로 유명한 고려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고구려 때 창간된 오래된 절로, 지금은 절보다 낙조 풍경으로 더 유명하다. 적석사의 낙조대는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대 중 하나로 꼽힌다. 



소래포구에서 버스를 타고 적석사 근처에 내렸다. 하지만 적석사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적석사는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한참 올라야 했다. 얼마나 바삐 걸었을까. 적석사에 도착하니 대웅전 앞으로 펼쳐진 바다에 노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절에서 300미터 정도 더 올라가야 하는 낙조봉. 또다시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오르다 보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커다란 불상이 세워진 보타전이 나왔다. 불상 앞쪽으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낙조대가 있었다. 



다시 안간힘을 다해 보타전을 지나 낙조봉에 도착했다. 절에서도, 낙조대에서도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날은 춥고 스산하고, 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싶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에 거의 맞닿은 해를 내려다봤다. 그날의 노을은 뜨겁게 불타오르거나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지 않았다. 불그스름하던 하늘은 이내 보랏빛으로 변해갔고, 붉은 해는 공기 속에 남아 있던 온기와 어지러이 흩어진 구름들을 모두 끌고 검푸른 바다로 침잠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가 바다로 조용히 가라앉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차가운 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십대의 무모한 열정과 혼란한 마음이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랄까. 나를 버리고 간 모든 것들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온전히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새날이 되면 새로운 무언가가 다시 조금씩 움틀 것만 같았다. 언뜻 눈물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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