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비양도
제주에서는 어디서든 하늘과 바다와 오름이 만든 근사한 노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주의 서쪽 해안가에서는 운이 좋으면 일생의 일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숙소를 구할 때 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뷰다. 특히 바다 근처라면 어떻게든 '오션뷰'를 찾는다. 다른 시설이 좀 떨어져도 오션뷰라면 다 용서된다. 창은 커야 하고, 바다는 가까이 넓게 보여야 한다. 남들은 잠만 자는데 무슨 뷰냐고 하지만, 숙소에서 뷰를 바라보는 것은 나에겐 또 하나의 여정이나 다름없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매년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떠나고 있다. 제주도는 취재나 가족여행으로 수없이 가봤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또 다른 느낌이라 매년 짧게라도 짬을 내서 다녀온다. 사진을 찍거나 먹고 즐기기 바쁜 취재나 가족여행과 달리, 혼자 여행을 가면 제주도의 자연을 좀 더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곳도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리고, 바다나 오름, 숲 같은 곳에서 멍하게 앉아 있다 오기도 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는 더더욱 오션뷰를 지닌 숙소를 구한다. 내가 만난 오션뷰 숙소 중 최고는 협재해수욕장 앞에 있는 작은 호텔이다. 그곳은 창이 큰 정도가 아니라 벽 전체가 아예 통유리창으로 돼 있다. 비취색 물빛으로 유명한 협재해수욕장과, 해수욕장 앞에 떠 있는 작은 섬 비양도가 창으로 그대로 들어온다. 단점은 유리에 선팅이 돼 있지 않아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인데, 다행히 내가 묵은 곳은 비교적 높은 층이라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이진 않았다.
사실 인터넷으로 숙소를 구하다 보면 오션뷰라 적혀 있어도 애매한 곳들이 많다. 막상 가보면 다른 건물들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이거나, 작은 창에 바다가 살짝 들어 있는 곳들도 적지 않다.
최고의 오션뷰를 지닌 숙소인 만큼 그곳에선 일몰도 최고였다. 늦은 오후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서 책을 보며 바다를 바라보니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초록색 모자처럼 생긴(<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이 든 모자처럼 생겼다) 비양도 주변이 점점 붉어지는데, 뭔가 굉장한 그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문득 이 아름다운 노을을 창이라는 필터 없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숙소 앞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지나 물가의 바위 쪽으로 점점 나아갔다.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편편한 바위에 앉아 일몰을 감상할 심산이었다.
앉기 좋은 곳을 찾아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해는 거의 수평선으로 다가들고 있었고, 절정의 순간을 이렇게 맞을 순 없다는 생각에 다시 숙소로 뛰었다. 방으로 갈까 하다가 숙소에 루프탑 바가 있다는 안내가 생각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 옥상에 가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그렇다고 큰일 날 것까지야!). 사방이 트인 옥상에서는 검붉은 바다는 물론 반대편 한라산 쪽의 거뭇한 하늘까지 사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바다 쪽 난간에는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고 난간의 기둥 사이로 비양도와 노을이 액자처럼 들어 있었다.
다행히 해는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이었고, 해가 지기 전 불그스름한 하늘이 해가 진 뒤 검푸르게 변하는 모습까지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 평생 동안 제주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은 사진가 김영갑의 표현이 떠올랐다. ‘삽시간의 황홀’. 이 순간을 그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루프탑 바에는 간단한 술과 안주도 팔고 있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며 와인잔에 담긴 빨간 샹그리아를 마시고 있으니 마치 유럽의 어느 섬에라도 온 것만 같았다. 혼행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 아닐까. 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자연 속에 있으면 외롭지 않다. 아니, 외로울 겨를이 없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입이 올라가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니. 다만, 이 좋은 걸 나눌 사람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