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백리섬섬길
여수는 멀지만 인연이 많은 곳이다. 이상하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수에 갈 일이 많았다. 오래전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간 오동도와 향일암부터 쉽게 가기 힘든 거문도, 벼랑을 걷는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까지, 참 많이도 다녔다. 여수엔 여수엑스포역과 공항이 있어 멀지만 기차와 비행기로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수는 갈 때마다 새롭다. 새로운 곳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곳들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행지의 진가는 여러 번 가봐야 알 수 있다. 누구나 처음 갈 땐 유명한 곳들만 찾아다닌다. 여러 번 가야 남들이 가지 않는 곳도 가보고 나만의 여행지를 찾을 수 있다.
최근에 찾은 여수의 명소 중 하나는 작은 섬들이다. 여수에는 섬이 많다.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해 317개에 이른다고 한다. 섬이라고 해서 배로 가는 먼 섬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수에는 다리로 연결돼 쉽게 갈 수 있는 섬들이 곳곳에 있다.
다리로 이어진 조용한 섬들은 여수의 서남쪽 화양면 아래에 몰려 있다. 여수 시내에서 돌산도(돌산읍)로 이어지는 동쪽과 달리 여수의 서쪽은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화양면 동쪽 끝에서 백야대교를 건너면 백야도가 나온다. 백야도에는 이름에 어울리는 하얀 등대가 있다. 푸른 바다에 우뚝 선 새햐얀 등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백야도는 가볼 만한 섬이다.
백야대교를 다시 건너 화양면 서쪽 끝으로 가면 다리로 연결된 4개의 섬을 만날 수 있다. 여자만을 끼고 여수와 고흥 사이에 떠 있는 조발도·둔병도·낭도·적금도다. 이름도 낯선 이 작은 섬들은 2020년 4개의 다리가 개통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여수시는 4개 다리와 백야대교를 포함해 2028년까지 모두 11개의 다리를 세워 돌산도부터 고흥까지 연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섬과 섬을 잇는 이 길의 이름은 ‘백리섬섬길’로 39.1㎞에 이른다. 드라이브로 10개의 섬을 둘러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개 다리 중 첫 번째는 화양면과 조발도가 연결된 화양조발대교다. 다리에 들어서자 170m 높이의 주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를 건너 조발도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길을 따라 가면 조발도에서 둔병도로 이어지는 둔병대교, 둔병도에서 낭도로 가는 낭도대교, 낭도에서 적금도로 연결되는 적금대교가 차례로 나온다. 다리의 모양도 제각각, 섬의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마치 터널을 나오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다리를 건널 때마다 어떤 섬과 바다가 나올지 궁금해진다. 마지막 적금도에서는 팔영대교를 건너 고흥으로 갈 수 있다.
4개의 섬은 모두 소박한 어촌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 섬의 속살을 보고 싶으면 어느 다리든 건넌 뒤 섬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볼거리가 있는 섬은 낭도다. 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나오는 여산마을은 정겹기만 한다. 작은 포구에 묶여 있는 낡은 고깃배와 돌담을 두른 오래된 집들. ‘갱번미술길’이라는 이름이 적힌 담벼락엔 액자 모양으로 그려진 벽화가 있다. ‘갱번’은 ‘바닷가’의 전라도 사투리로, 골목을 돌 때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그려진 130여 점의 벽화가 색색의 얼굴을 드러낸다. 낭도에는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3개 코스의 둘레길도 있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점점이 떠오르는 섬과 소박한 어촌 풍경. 그 여행에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그림은 노을이다. 해질 녘이 되자 서서히 내려앉는 붉은빛. 저 빛은 섬과 다리 사이 어디쯤에 안착할까. 그날도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만나기 위해 다리를 왔다 갔다 하며 포인트를 찾아다녔다.
사실,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와 시간을 찾는 것.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유명한 관광지에는 대부분 정해진 포인트가 있고, 어떤 곳들은 그 자리에 전망대나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그래서 누구나 똑같은 풍경을 마음에 담고 카메라에 담는다.
하지만 평범한 여행지들은 다르다. 내가 어느 곳에서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남들이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요소 중 하나가 노을이다. 자연을 어떤 구도로 조합해 노을과 버무릴지 내가 선택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근사한 사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나만의 사진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발견'이다. 그런데 간혹 그런 사진을 보고 그곳을 찾아간 사람들이 '별 것도 없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건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그 사람의 몫이니 어쩔 수 없다.
해가 점점 내려오고 4개의 다리를 오가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든 너무 좋아 어디에서 마지막을 봐야 좋을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살릴 것인지, 여러다리의 실루엣을 담을 것인지, 넓은 바다의 느낌을 강조할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이었다. 인생에도 이렇게 좋은 선택지들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최상의 모범답안을 알 수 없기에 다리와 섬이 적당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나처럼 기다림은 길지만 절정의 순간은 순식간이었다. 순간의 찬란한 황홀. 섬을 품은 '여수 봄바다'의 노을은 따사로웠다. 거친 바람도, 거센 파도도 없었다. 어둠이 내리고 다리에 하나둘 불이 켜지자, 어깨를 겯고 하나가 된 섬들이 마음에 불을 환하게 밝혔다. 그날의 노을은 나에겐 최상의 선택이었다. 인생이 그렇듯 자연엔 정답이 없고 틀린 답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