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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눈부신 풍경 속 허기진 기억

통영 소매물도, 비진도, 욕지도

소매물도와 비진도, 욕지도는 한 묶음으로 떠오르는 섬들이다. 모두 통영에서 배를 타고 가는 섬이라 그렇기도 하고, 한번에 세 섬을 모두 다녀와서 그렇기도 하다. 

 

세 섬 모두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통영이 품은 많은 섬들 중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섬들이다. 하지만 내겐 멋진 풍경보다 허기진 기억으로 남은 곳들이다. 지금이야 먹을 곳도 잘 곳도 많이 생겼겠지만, 그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섬다운' 곳이었다. 그때라고 해봐야 20년도 지나지 않은 과거일 뿐인데 그 사이 세상은 많이도 변한 듯하다. 어딜 가나 카페와 식당, 펜션들이 즐비하니 말이다. 


세 섬을 찾은 건 섬을 주제로 한 여행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2000년대 후반이라 그때만 해도 웬만한 섬에는 적당한 편의시설이 있었고, 그래서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섬을 찾았다. 아니, 사실은 좀 더 알아보고 갔어야 했는데 섬에 가면 뭐든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준비 없이 떠난 게 문제였다. 통영항 근처에서 사진기자와 함께 점심으로 충무김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가게에서 뭘 사 가려다가 섬에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고 소매물도행 배를 탔다.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소매물도는 비취색 바다와 바다보다 더 파란 하늘로 우리를 맞이했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호객을 하는 한 민박집 주인을 따라갔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배를 몰아 준다는 말에 그곳을 선택했다. 섬 밖에서 보는 섬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을 따라 도착한 민박집은 허름한 옛 시골집이었다. 어차피 섬에는 현대식 시설을 갖춘 펜션이나 민박이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냥 그 집에 묵기로 했다. 짐을 풀고 우리는 배를 타러 주인을 따라나섰다. 

밖에서 바라보는 섬은 날카로웠다. 깎아지른 절벽들이 곳곳에서 거센 파도와 맞서며 절경을 자아냈다. 



포말을 맞아가며 작은 배를 얼마나 탔을까. 배 옆으로 고기잡이 어선이 지나갔고, 민박집 주인은 어선의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선장이 잡은 물고기들을 던져줬다. 커다란 참돔이었다. 

“이거 얼마면 돼요?” 갑자기 사진기자는 회를 떠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민박집 주인은 그러마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거리까지 마련해 기분 좋게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참돔은 정말 컸다. 50~60센티미터는 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민박집 주인이 정말 회만 썰어 준 것이었다. 식당을 운영하지 않는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회와 초장, 그리고 소주가 전부였다. 한 마리를 다 썰었으니 회는 어찌나 많던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고, 김치 하나 없이 회를 먹으니 금세 물렸다. 


하는 수 없이 주인에게 김치를 얻으러 갔으나 정말 김치뿐이었다. 밥도, 라면도 없었다. 김치만 겨우 얻어 회를 계속 먹었지만 회만으론 배가 차지 않았고, 그마저도 물려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점심에 충무김밥을 먹은 뒤로 회밖에 안 먹었으니 배가 고팠다. 통영에서 배를 기다리며 가게에 들르려다 만 것도 후회스럽고, 충무김밥을 사오려다 만 것도 후회스러웠다. 설마 이렇게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을 줄이야. 




그래도 섬은 너무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폐교가 된 초등학교를 지나 등대섬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본섬과 이어진 작은 등대섬은 물때가 맞으면 길이 열려 건너갈 수 있었다. 오래전 한 CF에 나오며 유명해진 등대섬은 광고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푸른 초원 같은 언덕에 하얀 등대가 그림처럼 서 있는 모습.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 따윈 잊을 수 있었다. 



등대섬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소매물도의 언덕에 누워 바라본 하늘이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기 전 혼자 산책을 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을 발견하곤 언덕의 바위 위에 그냥 누워 버렸다. 투명하게 맑은 하늘에 흘러가는 하얀 구름과 살랑이는 바람. 하늘은 그 어떤 멋진 풍경보다도 아름다웠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나는 여행지에서 하늘과 바람이 좋은 곳이면 일단 누워 본다. 바닥은 판판한 바위나 나무라면 좋고, 잔디밭도 좋다. 머리나 옷에 뭐가 묻으면 좀 어떠랴. 툭툭 털어 내면 그뿐이다. 누워서 보는 세상은 서거나 앉아서 볼 때와는 다르다. 하늘의 색과 구름의 움직임, 바람의 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몸이 개운해진다. 중력을 향해 서 있던 몸이 분산되니 가벼워진다. 허리를 쭉 펴고 팔을 위로 뻗어보면 더 시원하다. 몸이 개운하니 마음도 상쾌해진다. 


그러고 눈을 감아본다. 스르르 금세 잠이 들 것 같다. 빛이 부드럽고 바람이 선선한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녁이면 더 좋다. 소매물도에서 삼십 분 넘게 누워 있었던 그 바위는 지금도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고, 다시 한 번 그곳에 누워 보고 싶다. 그날 이후 소매물도는 나에게 하늘과 바람의 섬으로 기억됐다.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등대섬까지 다녀와 취재를 마친 우리는 소매물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비진도에 도착했다. 비진도는 소매물도행 배가 중간에 들르는 곳으로, 통영에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우린 섬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평일이라 그런지, 식당 비슷한 이름이 붙은 곳을 모두 찾아갔지만 밥을 파는 곳은 없었다. 점심시간도 지나 2~3시쯤 되었을까. 몇 군데나 허탕을 치고 허기에 지칠 무렵, 우리는 식당이라는 간판은 있지만 식사를 팔진 않는다는 곳에서 사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무 배가 고픈데 그냥 있는 밥을 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랬더니 주인 아주머니는 밥이 있긴 한데 반찬이 없어 그렇게 팔 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냥 주겠다고, 자기들 먹는 밥을 그냥 줄 테니 먹으라고 했다. 우린 뭐든 허기를 채울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였고 내주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다 먹은 뒤 돈을 내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렇게 간신히 허기를 채운 뒤, 안섬과 바깥섬이 하얀 모래톱으로 이어진 비진도의 독특한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선유봉에 올랐다. 그제서야 비진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며 감탄사가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여행을 아무리 좋아한다 한들 먹고 사는 일에 비길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찾은 욕지도는 두 섬에 비해 꽤 큰 섬이다. 배에 차를 싣고 들어가 드라이브를 하며 섬을 둘러볼 수 있었다. 둥글둥글한 몽돌이 파도에 차르르 소리를 내는 작은 해변이 곳곳에 있었다. 섬은 호젓하고 좋았지만 걷지 않고 차로 둘러본 까닭일까. 그다지 기억에 남는 추억은 없다. 너무 짧게 둘러봐서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이래저래 세 섬은 모두 다시 가 보고 싶은 곳들이다. 이젠 그 섬들에도 먹고 잘 곳들이 많이 생겼을 것이다. 얼마나 변했을까.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섬은 잘 변하지 않는다. 특히 먼 섬들은. 변했다고 해도 도시의 변화 속도를 따를 수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간다 해도 배편이 정해져 있어 갈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섬이 좋다. 변하지 않아서 좋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익숙해질 수 있어 좋다. 그곳에선 화려하고 편리하고 깨끗한 걸 바라지 않게 된다. 화려하고 편리한 숙소도, 깔끔하게 잘 차려진 밥상도 찾지 않고, 소박하고 불편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건 자연이다. 섬만이 간직한 보물 같은 자연. 언제 다시 소매물도의 하늘을 누워서 바라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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