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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갇히고 싶은 섬

제주 추자도

“섬에 갇히는 게 꿈”이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그러나 일로 여행으로 꽤 많은 섬에 가봤지만 한 번도 갇힌 적이 없다. 섬에 머물다 비바람이 불거나 태풍이라도 올라치면 늘 ‘이 배가 아니면 못 나간다’는 재촉에 떠밀려 배가 끊기기 전에 나오곤 했다. 자의가 아닌 불가항력으로 섬에 갇히려면 자고 일어났을 때 배가 뜨지 않는 상황이 돼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가 뜨지 않아 섬에 갇히는 일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같은 것일까.(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본 걸 생각하면 삼대가 덕을 쌓았다는 얘긴데….)


섬에 갇히고 싶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농담으로 듣는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주어지는 ‘뜻밖의 시간’에 놓여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취재나 여행으로 떠난 섬에서 계획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시간은 덤이고, 그 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여유롭게 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늘 시간에 쫓기듯 사는 일상과,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모범생 증후군' 같은 게 있는 나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몹쓸 성격 탓에 여행을 떠나도 여유롭게 쉬거나 즐기지 못하고 시간을 헤아리느라 바쁘다. 무엇을 보고 먹든 ‘알찬 여행’을 해야 한다는 강박. 여행에서조차도 항상 이런저런 계획에 끌려 다니지만, 정작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무거울 뿐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시간, 내 의지로 더는 ‘알차게’ 보낼 수 없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하고 피곤한 성격이다.) 예를 들면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는 시간 같은 것. 머리를 맡긴 채 옴짝달짝할 수 없는 그 시간엔 그저 눈과 손의 자유만 주어져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거나 스마트폰 속의 시시껄렁한 이야기에 하염없이 빠져들어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 그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섬에 갇히고 싶은 로망은 하늘이 도와야 하니 일생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그러나 섬에 갇히지 못한다 해도 섬은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섬’이라는 단어부터 얼마나 매혹적인가. 외로움, 그리움, 호젓함, 아늑함, 쓸쓸함. 섬 하면 떠오르는 갖가지 형용사들은 나를 섬으로 이끈다. 




이 섬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섬에서 돌아 나올 때면 늘 하는 생각이다. 아니, 섬뿐 아니라 모든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면 생각한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섬일수록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다시 가 보고 싶은 첫 번째 섬은 추자도다. 가 본 섬 중에서 배를 오래 타는 먼 섬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들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는 섬에서의 진정한 휴식을 맛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는, 그야말로 ‘바다멍’에 빠질 수 있는 섬. 이름난 관광지가 많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무언가를 봐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사실 추자도는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서(?) 간 섬이다. 결혼 첫 해 여름휴가였던가. 바다를 좋아하는 남편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섬에 가자고 했다. 전라남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먼 섬. ‘추자’라는 촌스러운 여자 이름을 단 이 섬은 내가 잘 모르는 먼 섬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회사 일로 무척 바빴고, 모든 걸 준비했다는 남편만 믿고 아무 준비 없이 따라나섰다.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속하는 추자도는 완도나 해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거나, 제주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어느 쪽에서도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완도까지 내려가 완도에서 하룻밤을 자고 배를 탔다. 완도에서 아침 일찍 배가 뜨기 때문이었고, 배에는 차를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시간 정도 배를 타고 추자도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순간 알았다. 이곳에 오게 된 진짜 이유를. 항구에는 ‘바다낚시의 천국’이라는 플래카드가 떡하니 걸려 있었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길고 커다란 가방을 둘러멘 낚시꾼들이었다. 아, 낚시 마니아인 남편이 추자도를 택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구나. 바다낚시의 천국!


추자도는 정말 낚시꾼들의 천국이었다. 배에서 내리니 민박집 주인들의 호객 행위가 이어졌는데, 그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두 낚시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낚싯배를 운영하는 곳들이라 우리 같은 커플은 상대로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남편도 낚시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나와 함께 있어서인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배에서 관광객 같은 차림을 한 사람, 그리고 젊은 여자는 나 혼자였다.

그땐 민박이나 펜션을 미리 예약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알아보던 시절이라 우린 민박집 몇 군데를 돌았다. 그러나 모두 숙식을 제공하는 곳들이어서, 직접 밥을 해 먹을 요량으로 버너에 코펠까지 챙겨간 우리에겐 맞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다행히 콘도 비슷한 곳을 찾았다. 방도 꽤 큰 데다 밥도 해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통유리창에 바다가 그대로 들어 있는 전망이 끝내줬다.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가 세워진 두 개의 방파제가 수평선과 나란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모습. 그 풍경을 바라보며 일주일을 보냈다. 눈 뜨면 등대를 바라보고, 밥 먹고 바닷가에 나가 산책하고,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하다가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상추자도에서 다리를 넘어 하추자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라는 이생진 시인의 시구처럼 살아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일주일을 살았다. 





맑고 투명한 바다에선 낚싯대를 던지기가 무섭게 물고기가 잡혔다. 돌돔이나 참돔 같은 고급 어종들이 나 같은 초보 낚시꾼에게도 걸려들었으니 말 그대로 바다낚시의 천국이었다. 심지어는 파도에 쓸려 왔는지 30센티미터가 넘는 광어 한 마리가 갯바위의 작은 웅덩이에 갇혀 있어 손으로 광어를 잡기까지 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낚시를 한 기억은 선명하지만 추자도의 특별한 볼거리나 관광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멀고 작은 섬이라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먼 섬이라 오래 머무를 수 있었고, 작은 섬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시간이 남았다. 특별한 볼거리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바다만 바라봐도 아쉬울 게 없었다. 



섬 여행은 그래야 한다. 바다만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우린 얼마나 바쁘게 여행을 다니는가. 무언가를 찾아다니며 보고 먹느라 정작 어느 한 곳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진정한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멀고 작은 섬으로 가보자. 그리고 그 섬에서 며칠 머물러보자. 배가 뜨는 시간이 정해진 섬에서는 배가 뜨기 전까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은 덤이다. 그런 시간이 진정한 휴식을 가져다준다. 갯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섬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말도 걸어 보고, 포구의 이름 없는 식당에서 낯선 음식도 먹어 보고, 캄캄한 밤바다에서 하얀 등대의 불빛을 따라가 보고….


이제 추자도는 그때보다는 많이 알려졌다. 요즘은 추자도에도 올레길이 생겨 낚시뿐만 아니라 트레킹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추자도에 가서 올레길을 걷고 낚시도 하고 싶다. 그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정말 다시 잡힐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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