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선유도
군산의 선유도는 두 번씩이나 들어가지 못하고 선착장 앞에서 돌아온 섬이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돼 쉽게 갈 수 있지만, 다리가 연결되기 전까진 배로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꽤 먼 섬이었다.
첫 번째는 대학시절, 나의 여행 메이트인 친구 D와 함께였다. 어쩌면 나의 여행 세포를 키운 건 그 친구였는지 모른다. 혼자서 가기 망설여지던 곳들을 그녀와 함께 가기 시작하면서 여행의 폭이 넓어지고 배포도 커졌으니 말이다.
여행을 좋아하던 우리는 틈만 나면 여행 갈 구상을 했다. 어느 여름방학이었다. 그녀는 잡지 <한겨레21>에 실린 선유도 여행기사를 가져와서는 이곳에 가자고 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우리는 책이나 신문, 잡지를 보고 여행지를 찾았는데, 여행이 지금처럼 일상화되지 않았던 그땐 여행기사 자체도 많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에게 부산에서 선유도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였고, 그저 전라도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그러나 고속버스를 타고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부안의 격포까지 가는 동안 장대비가 내렸고, 아무도 없이 우리 둘만 싣고 가던 버스는 비바람이 치는 격포항에 우리를 덩그마니 내려놓고 가 버렸다.
시커먼 갯바위에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격포라는 이름은 또 얼마나 격정적인가. 그 스산하고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우리는 선유도행 배가 뜨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어찌어찌 허름한 민박집을 잡고 늦은 밤까지 소주를 마셨다. 빗소리를 들으며 작은 코펠에 부친 전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정겨웠던 그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매끼 식단까지 짜서 그 재료를 모두 싸 가지고 다녔다. 하루에 쓰는 돈도 정해두고 간식을 사 먹거나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알뜰한 여행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선유도를 포기하고 부안 여행에 나섰다.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없던 시절이라 여행지에 대해 알아볼 방법도, 아무런 계획도 없었던 우리는 현장에서 간판에 보이는 관광지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격포의 채석강과 내소사. 얇은 판 같은 바위가 켜켜이 쌓인 절벽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채석강은 부산 바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울창한 전나무숲을 지나 만난 내소사는 예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로 우리를 매료했다. 특히 꽃살문이 아름다운 대웅전과, 단청을 칠하지 않아 빛바랜 나뭇결이 돋보이는 2층 누각 봉래루의 모습은 마음에 깊이 남았다.
내소사를 둘러보던 우리는 절 뒤편에서 등산로를 발견하고 예정에 없던 등산을 했다. 알고 보니 변산반도국립공원의 내변산이라는 산이었다. 전날 비가 많이 온 산은 청량했고 물이 많았다.
둘이서 한참 산을 오르는데 울창한 숲 너머 계곡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나무 사이론 여자들이 언뜻 보였고, 우리의 발소리를 들은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가렸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망을 보고 있었다. 나이는 삼심대쯤 됐을까. 다행히 여자인 우리를 보고 그들은 안도하면서 너무 더워 물에 들어간 거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삼십대인 그들은 친구끼리 함께 처음 여행을 왔다며 이십대인 우리를 부러워했다. 그렇게 젊을 때부터 함께 여행을 다니니 얼마나 좋냐고 하면서.
가다 보니 호수와 폭포가 나타났다. 높은 산 위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호수는 마치 백두산 천지나 한라산 백록담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고 신비로웠다. 20미터가 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시원하게 물을 쏟아부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우리를 찍어주고, 우리는 그들을 찍어줬다. 한참 나중에야 그 멋들어진 호수와 폭포가 꽤나 유명한 직소보와 직소폭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함께 등산을 하고 내려와 우리는 그들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저녁도 얻어 먹었다. 멋진 우정을 오래 간직하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 우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도 저들처럼 서른이 되어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를 부러워했지만, 우린 그들이 부러웠다. 이십대 초반이던 그때 서른은 까마득한 나이였고, 서른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우리가 계속 만나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한참이 지나 삼십대에 우린 같이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나는 서울에서 취직을 해 회사에 다녔다. 그녀가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서로 일하고 아이 키우느라 바빠 함께 여행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섬 여행은 변화무쌍해서 좋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섬은 때론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때론 뜻하지 않은 추억을 선사하기도 한다. 비록 선유도엔 못 갔지만, 선유도 대신 간 곳들도 섬 못지않게 좋았다.
여행이란 그런 게 아닐까. 예정에 없던 곳을 우연히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걸 발견하는, 몰랐던 샛길이 나오면 그 길로 들어가 끝까지 가 보는, 그 속에서 남들이 모르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것. 인터넷으로 모든 걸 다 알아보고 예약하고 가는 요즘 시대의 여행에선 좀처럼 얻기 힘든 즐거움일 것이다. 문득 아날로그 시대의 여행이 그리워진다.
두 번째로 선유도를 찾은 건 남편과 함께였다. 그때 선유도에 못 간 이후로 선유도는 언젠가 꼭 가봐야 할 숙제처럼 여행지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었고, 어느 겨울 선유도로 다시 떠났다.
이번엔 격포가 아닌 군산항에서 배를 타기 위해 군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도 군산항에 도착하자 비가 내렸다.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군산 내항은 비가 내리니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역시나 배는 뜨지 않았고, 우리는 숙소를 잡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무슨 이유였는지 아침 일찍 우리는 목욕탕엘 갔다. 시골의 조용한 목욕탕에서 깨끗하게 아침을 맞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그 오래되고 낡은 목욕탕에서 나는 어이 없는 일을 겪었다. 여행을 온 지라 별다른 목욕도구를 챙기지 않고 여탕에 들어간 나는 자리마다 목욕가방이 있기에 이곳에서는 그냥 함께 쓰는 건가 싶어 비누를 꺼내 썼다.
그런데 욕탕 안에서 그걸 본 한 아주머니가 남의 걸 쓰면 어떡하냐고 소리치며 나를 도둑으로 몰아갔고,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맨몸으로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느낌이란... 그 많은 목욕바구니마다 다 주인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시골 목욕탕이었다. 한편으론 그렇다고 비누 좀 쓴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무안을 줄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한쪽 구석으로 쫓겨나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 버렸다. 지금도 군산 하면 그 낡고 오래된 목욕탕의 드센 분위기가 기억난다.
두 번의 허탕은 생각지도 못한 추억과 얘깃거리를 만들어줬다. 결국 일로 떠난 세 번째 여행에서야 선유도 입성에 성공했다. 선유도는 다리로 연결된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4개의 섬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다리로 연결된 이 섬들은 자전거를 타며 둘러보기 좋아 자전거를 테마로 여행기사를 구상했다. 선유도엔 자전거길이 나 있고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나의 자전거 실력이 문제였다. 능숙하게 타는 사진기자와 달리 나는 거의 자전거를 끌고 가다시피 하는 수준이었다. 사진기자는 나 때문에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결국 그 속도로 이틀 동안 섬을 모두 둘러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둘째 날엔 스쿠터를 타기로 했다. 선유도에서는 자전거뿐 아니라 스쿠터도 빌릴 수 있었고, 마침 사진기자는 스쿠터를 탈 줄 알았다.
사진기자 뒤에 타고 스쿠터로 쌩하니 돌아보는 섬은 너무 좋았다. 우리가 얼마나 섬 곳곳을 누비고 다녔는지 우리를 보는 주민들의 눈빛이 ‘년놈들이 자알 논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세 번째 여행에서야 온전히 다 둘러본 선유도는 정말 이름처럼 신선이 놀(仙遊) 만한 섬이었다. 하얀 모래가 너무도 고운 명사십리해수욕장, 붉은 칠면초와 갈대가 너울대는 폐염전, 대장도와 장자도 사이 해안가에서 바라본 그림 같은 낙조...
지금은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연륙교로 연결돼 배를 타지 않고도 선유도에 갈 수 있게 됐다. 새만금방조제와 이어진 신시도에서 고군산대교만 넘으면 무녀도에 도착한다. 다리로 연결된 섬들은 쉽게 갈 수 있는 반면 섬을 찾아가는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만큼 섬의 호젓한 분위기도 덜할 수밖에 없다. 선유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부디 그때 그 모습이 많이 훼손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네 번째로 선유도를 찾을 날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