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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등대에서의 하룻밤

여수 거문도

바닷가에서 하얀 등대를 보면 꼭 그 앞까지 가보고 싶어진다. 방파제 끝에 서 있는 작은 등대든, 높은 곳에 우뚝 선 채 빛을 밝히는 등대든, 등대는 바다여행에서 포인트가 된다. 푸른 수평선만 있는 바다도 좋지만, 등대가 점처럼 찍힌 바다도 좋다. 푸른 바다에 작은 등대 하나만 있으면 바다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등대지기라는 이름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바다 끝에서 홀로 등대를 지키는 사람, 온종일 바다와 함께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등대지기를 동경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등대지기도 엄연한 직업이므로 감성적인 이미지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사실 모두 등대라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런 시설들을 통칭하는 용어는 항로표지관리소이며, 용도와 모양에 따라 등대, 부표, 입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등대지기의 정식 명칭도 항로표지관리원이다. 


언젠가 등대를 주제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포항 호미곶등대, 경주 송대말등대, 울산 간절곶등대를 둘러보면서 낭만적으로만 생각했던 등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고, 등대 안에 들어가 불빛이 나오는 등명기를 가까이서 보기도 했다. 


잘 깎은 연필을 세워 놓은 것 같은 호미곶등대는 근처에 등대박물관도 있어 등대여행으로 찾아 볼 만하다. 호미곶등대는 대한제국 시대에 만들어져 서구식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으며 최근엔 세계등대유산으로도 선정됐다. 경주 감포에 있는 송대말등대도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이견대를 형상화한 독특한 모양이 기억에 남는다. 울산의 간절곶등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알려진 간절곶 바다와 등대가 어우러져 일출을 보기에 좋다. 




거문도는 등대와 함께 떠오르는 섬이다. 거문도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두 개의 등대가 있다. 거문도등대와 녹산등대다. 하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거문도는 내게 등대와의 하룻밤을 선사한 곳이다. 등대 아래서 하룻밤을 잔다니 꿈 같지 않은가. 


우리나라 등대 중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해양수산부가 몇몇 등대에서 등대 체험숙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거문도등대도 그중 하나다. 등대 체험숙소는 등대지기가 살던 관사 같은 곳에서 숙박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방해양수산청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의외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땐 등대숙박을 신청하려면 사연을 적어야 했다. 많은 인원이 등대숙박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연을 보고 당첨자를 선정한 것이다. 이벤트 같은 것엔 전혀 관심도 없는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연을 보내 당첨이 됐다. 결혼 몇 주년 기념 여행이라고 했다는데 간절하게(?) 썼던 모양이다.  

거문도는 여수에서 배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섬이다. 그 먼 섬을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등대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다는 얘기에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 



그런데 거문도등대에서 호사를 누리려면 약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한 시간 가까이 산을 넘고 트레킹을 해야 한다. 문제는 등대 주변에 아무런 시설이 없어서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이고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해 먹는 데 필요한 집기에다 장까지 봐서 한참을 걸었다. 


바다를 따라 갯바위를 오르내리고 울창한 동백숲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멀리 바다 끝에 우뚝 솟은 하얀 등대가 보였다. 등대 쪽으로 가까이 가자 등대 옆으로 나지막하고 아담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우리의 하룻밤을 책임질 곳이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푸른 언덕 위에 서 있는 순백의 등대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그들과 함께 섬을 지키는 작은 집. 



아니, 집은 생각보다 컸다. 20평 정도 되는 집은 콘도처럼 거실과 주방에 방 2개가 있는 구조라 우리 가족이 쓰기엔 넓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주변에 어떤 집이나 건물도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옆에 등대와 바다가 있다는 것이었다. 관사에 머무는 우리와 등대지기 말고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무인도에 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바다를 독차지한 느낌, 바다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는 느낌. 혼자였다면 무서울 수도 있었겠지만 가족이 함께하니 오붓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등대지기도 좋은 사람이었다. 평생 바다만 바라보며 등대를 지키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 싶었는데, 만나 보니 평범한 아저씨였다. 등대지기는 사람이 그립다며 우리를 반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여수에서 출근하는데 두 사람이 며칠씩 교대로 근무한다는 얘기부터, 여기 오는 사람들은 먹거리를 이고 지고 오는데 어느 회사에서 단체로 올 땐 귤 한 상자를 짊어지고 오기도 했다는 이야기까지. 


그러다 밤에는 등대지기와 함께 낚시를 했다. 등대지기는 진짜 낚시꾼이었다. 하긴 이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무얼 하겠는가. 물고기는 낚싯대를 던지기가 무섭게 잘 잡혔다. 인적이 드물고 청정한 섬이라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낚시도 좋았지만 이날 밤의 백미는 등대였다. 거문도등대는 두 개다. 1905년 남해안 최초로 세워진 옛 등대와 2006년 설치된 새 등대. 언덕 위에 우뚝 선 커다란 등대가 새 등대로, 33미터 높이에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옛 등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하고 예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등대의 불빛을 보기 위해 캄캄한 밤길을 걸어 등대로 갔다. 새 등대는 밤에 보니 더 거대했다. 등대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 하얀 파도가 바위를 사정없이 때렸다. 바람은 검은 장막을 찢어 버릴 기세로 거세게 몰아쳤다. 걷잡을 수 없이 휘날리는 옷과 머리카락을 연신 추스르며 검은 바다를 가르는 한 줄기 빛을 눈으로 따라갔다. 


빛은 거센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묵묵히 오가며 바다를 비췄다. 검은 바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그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서 있어도 이 빛만 있으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인생에서도 언제나 묵묵하게 나를 비춰주는 이런 빛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그 어마어마했던 바람과 그 찬란했던 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등대 아래서 원없이 바람을 맞은 뒤엔 등대 내부로 들어갔다. 좁고 컴컴한 속에서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위를 올려다봐도 아래를 내려다봐도 빙글빙글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지나온 시간 같기도 하고 다가올 시간 같기도 했다.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힘든 곳에서 제자리걸음 하듯 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떨어지지 않게 난간을 꼭 잡고 계속 오르다 보니 어느덧 끝이 보였다. 



다음 날엔 또 다른 등대를 향해 걸었다. 거문도등대 반대쪽에 있는 녹산등대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그리고 고도 세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는데, 서도의 남쪽 끝에 거문도등대가, 북쪽 끝에 녹산등대가 있다. 녹산등대까지는 바다와 함께 푸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등대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 시가 적혀 있어 걷는 재미를 더했다. '섬 시인'으로 알려진 이생진 시인의 <녹산 등대로 가는 길>이라는 시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결국 갯쑥부쟁이도 등대 밭 밑에 와서

얼어붙은 마음을 달래달라며

외로운 것들끼리 어루만진다

등대는 시인이 가야 할 종점 같은 곳

오늘 낮에는 민들레가 등대 밑에서

소꿉장난을 하다가 갔다



인어공주상이 있는 인어해양공원을 지나 녹산등대에 다다랐다. 녹산등대는 웅장한 거문도등대와 달리 초원 위에 아담하게 서 있었다. 하얀 등대 아래 앉아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내려다봤다. 밤의 등대가 번쩍이는 긴 칼을 차고 마음을 단단하게 여며 주는 장수 같다면, 낮의 등대는 하얗고 말간 얼굴로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는 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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