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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비움과 채움의 시간

여수 향일암

절집에서의 하룻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버킷리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적막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불자들만이 있는 절에서 홀로 묶는 것은 여러 명이 함께 체험하는 템플스테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으면서 오로지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절집만 한 데가 있을까. 


그런 곳에 머물기 위해 아예 작정을 하고 떠난 절은 여수의 향일암이다. 일출로 유명한 향일암은 그 전에도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멋진 요사채가 있는지는 몰랐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현실 도피 또는 요양의 목적으로 찾아간 절이었는데, 정말 ‘내 인생의 요사채’라 할 만한 곳을 만났다. (이후 그 방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회사에 다니며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그때,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쉬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도 번거롭게 느껴졌고, 그렇다고 집에서 쉬자니 어린아이가 있어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고, 그런 곳으로 조용한 절이 떠올랐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한 절밥이나 먹으면서 쉬면 모든 게 조금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우 얻은 일주일의 휴가. 템플스테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라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 찾은 곳이 향일암이었고, 기와 불사나 하면 일주일 묵게 해 준다고 했다. 행여 절에서 뭔갈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다행히 공양 시간만 지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혼자 여수로 내려가 버스를 타고 향일암으로 갔다. 여수 돌산도의 끝 금오산 자락에 자리 잡은 향일암은 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절에 도착해 지인이 소개해 준 스님을 만나 안내를 받고 숙소로 향했다. 그 숙소는 보살들이 머물다 가는 방이었는데, 방문을 열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넓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창에는 망망대해가 들어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푸른 수평선과 하늘만 보였다.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절벽 아래로 짙푸른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방에서 나는 태어나서 가장 편안한 일주일을 보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며칠을 산 느낌이랄까.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쉬지 못하고 살아온 것일까. 직장생활을 한 이래 그렇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았고, 겨우 휴가를 낸다 해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느라 분주했다. 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더미에 깔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몸과 마음은 낡아가고 있었다.



공양 시간은 6시였다. 처음엔 공양을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났지만 며칠 뒤엔 그마저도 생략했다. 자고 싶으면 더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바다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때때로 절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산책을 했고, 가끔 절 밖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 여수시내를 구경했다.


이삼일 지나자, 절 생활이 익숙해져 다른 보살들의 얼굴도 익히게 됐다. 합장을 하고 인사 정도만 했는데, 대부분 50~60대인 보살들은 혼자 지내는 젊은 여자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무슨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엔 한 보살이 절에서 제를 지내는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은 과일과 떡 같은 제수를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렇게 보살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러고 살아도 되겠다, 이렇게 조용히 숨어들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날마다 나물 반찬에 건강식으로만 먹으니 몸도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찌들고 찌든 마음은 예불로 풀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108배를 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두 손을 모아 엎드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무언가 오랫동안 쌓여 있던 응어리들이 마룻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또 일출 명소로 알려진 관음전에 올라가 바다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 방에서 바라보던 바다를 그리워하며 또 얼마간 버텨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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