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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시간

여수 향일암

by 풍경

송광사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뒤, 절집에서의 하룻밤은 '언젠가 또 한 번'이라는 작은 바람으로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적막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불자들만이 있는 절에서 홀로 묶는 것은 여러 명이 함께 체험하는 템플스테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으면서 오로지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절집만 한 데가 있을까.


그런 곳에 머물기 위해 아예 작정을 하고 떠난 절은 여수의 향일암이다. 일출로 유명한 향일암은 그 전에도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렇게 멋진 요사채가 있는지는 몰랐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현실 도피 또는 요양의 목적으로 찾아간 절이었는데, 정말 ‘내 인생의 절집’이라 할 만한 곳을 만났다. (이후 그 방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그때,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쉬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도 번거롭게 느껴졌고, 집에서 쉬자니 가족들이 있어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고, 그런 곳으로 조용한 절이 떠올랐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한 절밥이나 먹으면서 쉬면 모든 게 조금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우 얻은 일주일의 휴가. 템플스테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라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 찾은 곳이 향일암이었고, 기와 불사나 하면 일주일 묵게 해 준다고 했다. 행여 절에서 뭔갈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다행히 공양 시간만 지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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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수로 내려가 버스를 타고 향일암으로 갔다. 여수 돌산도의 끝 금오산 자락에 자리 잡은 향일암은 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절에 도착해 지인이 소개해 준 스님을 만나 안내를 받고 숙소로 향했다. 그 숙소는 보살들이 머물다 가는 방이었는데, 방문을 열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넓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창에는 망망대해가 들어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푸른 수평선과 하늘만 보였다. 창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절벽 아래로 짙푸른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방에서 나는 태어나서 가장 편안한 일주일을 보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며칠을 산 느낌이랄까.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쉬지 못하고 살아온 것일까. 직장생활을 한 이래 그렇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 휴가를 낼 수 있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았고, 겨우 휴가를 낸다 해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느라 분주했다. 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더미에 깔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몸과 마음은 낡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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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시간은 6시였다. 처음엔 공양을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났지만 며칠 뒤엔 그마저도 생략했다. 자고 싶으면 더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바다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때때로 절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산책을 했고, 가끔 절 밖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 여수시내를 구경했다.


이삼일 지나자, 절 생활이 익숙해져 다른 보살들의 얼굴도 익히게 됐다. 합장을 하고 인사 정도만 했는데, 대부분 50~60대인 보살들은 혼자 지내는 젊은 여자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무슨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엔 한 보살이 절에서 제를 지내는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은 과일과 떡 같은 제수를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렇게 보살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러고 살아도 되겠다, 이렇게 조용히 숨어들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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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나물 반찬에 건강식으로만 먹으니 몸도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찌들고 찌든 마음은 예불로 풀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108배를 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두 손을 모아 엎드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무언가 오랫동안 쌓여 있던 응어리들이 마룻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일출 명소로 알려진 관음전에 올라 바다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절집에서 바라보던 바다를 그리워하며, 그 절집의 따스한 온기를 몸으로 기억하며, 또 얼마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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