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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함께한 기억으로 더욱 아름다운 섬

인천 굴업도와 소야도

인천의 섬들은 수도권에 산다면 쉽게 갈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보다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강화도나 영종도처럼 다리로 연결된 섬들은 몰라도 배를 타고 제법 나가야 하는 섬들은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인천에서 갈 수 있는 섬 중에도 좋은 섬들이 많다. 섬이 많은 남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러 가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리지만, 인천은 수도권에서 가까워 차가 막히는 여름 휴가철에 가기에 적당하다.


여름이면 덕적도, 장봉도, 대이작도 등 인천의 여러 섬들을 가곤 했다. 그중에서도 굴업도와 소야도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굴업도는 한때 핵폐기장 건설 문제로 이슈가 되기도 한 섬이다. 별로 정감이 가지 않는 이름에다 핵폐기장과 관련된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굴업도가 나의 여행지 목록에 오른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는 역사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북한에서 살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 대한 세세한 얘기는 그동안 들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나의 조부모인 부모님과 함께 한강을 건너 남으로 왔는데, 그때 바로 미군들에 의해 굴업도로 보내졌다고 한다. 아마도 남한에 정착시켜도 되는지 검증하는 단계였던 것 같다. 굴업도에서 3개월을 살았는데, 마지막에는 미군들이 총구를 겨눈 채 남한으로 갈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지 묻기도 했다고 하니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구술에 따른 것이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얘기를 듣고 찾아 보니 굴업도에는 아버지처럼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굴업도에서 살았던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매일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고 물놀이를 하면서, 가진 건 없었지만 어촌마을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고. 그러면서 죽기 전에 굴업도에 꼭 다시 가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부산에 살던 아버지에게 굴업도는 평생 가기 힘든 멀고 먼 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어느 여름, 부모님이 다른 일로 서울에 올라오시는 날에 맞춰 여행계획을 세웠고, 아버지는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굴업도는 인천에서도 바로 가는 배가 없어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했다. 덕적도를 거쳐 두 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굴업도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핵폐기장을 세우기엔 아까운, 너무나 청정한 곳이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민박집으로 갔다. 그곳은 인터넷으로 적당히 고른 집이었다. 아버지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민박집 주인에게 옛날이야기를 했고, 당시 옆집에 살던 친구 누구를 아느냐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민박집 주인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친구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반가워하며 옛날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굴업도에 머무는 내내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셨다.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인지,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는 굴업도의 자연과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개머리언덕이라는 드넓은 초원 같은 곳을 수시로 산책하며 한없이 바람을 맞았던 기억이 스친다. 탁 트인 바다와 주변 섬들을 바라보며 은하수도 볼 수 있는 개머리언덕은 요즘 백패커들의 성지로 꼽힌다고 한다. 


어릴 땐 아버지가 과거 이야기를 하시면 지겨워하며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인생이 궁금해졌다고 할까. 그러나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그 드라마 같은 이야기도 더는 들을 수가 없다. 


요즘은 아버지에게 여러 번 들은 이야기조차 가물가물해지며 내 기억이 의심스러워지는 나이가 됐다. 그때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았을까. 왜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가 가고 싶어하던 곳들을 더 많이 함께 가보지 못했을까. 굴업도의 기억을 떠올리니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들이 아쉬움으로 스러진다. 




소야도도 부모님과 함께 찾은 섬이다. 덕적도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섬 소야도에 가려면 지금은 덕적도에서 덕적소야교를 건너면 된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 덕적도 선착장에 내려 작은 배를 갈아타고 10분 정도 가야 했다. 



소야도는 예쁜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해변을 갖고 있었다. 떼뿌루해수욕장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해변에는 물이 빠지면 고운 갯벌, 아니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렇게 넓은 모래사장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어느 여름 날, 우리는 그 넓은 해변을 쏘다니며 온종일 조개를 캐면서 놀았다. 조개가 어찌나 잘 잡히는지, 발가락으로 모래를 파기만 해도 동그랗고 딱딱한 조개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모님과 남편, 아이까지 다섯 명이 하루 종일 캤으니 조개는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만선이라도 한 듯 양손을 무겁게 하고 득의양양하며 민박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그 조개를 삶았다. 그런데 아뿔싸! 삶은 조갯살을 꺼내 먹어 보니 모래 덩어리였다. 해감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삶은 것이다. 그 많은 조개를 먹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우리는 다시 노동에 들어갔다. 온 가족이 매달려 밤새 그 조개의 모래를 이쑤시개 같은 걸로 빼낸 것이다. 다리가 저리고 어깨가 아팠지만 우리는 수다를 떨어가며 모래를 빼냈고, 다음 날 아침 그렇게 강제 해감시킨 조개로 죽을 끓였다. 고생 끝에 맛본 조개죽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쩌면 여행의 완성은 풍경보다는 사람인지 모른다. 같은 여행지라도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소야도의 해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 건 가족이었다. 지금 다시 가도 그렇게 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갯벌을 볼 수 있을까. 그 해변이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해변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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