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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 Oct 30. 2022

푸른 그늘에 오롯이 숨다

제주 한남삼나무숲

바다는 그저 짝사랑이어도 좋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그 파란 물속에 들어가 물의 감촉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 바다가 나를 만져주지 않고 외면할지라도, 바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저만치 멀어져가는 모습에 오히려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숲에게는 사랑을 받고 싶다. 그 푸른 품에 안기고 싶다. 커다란 나무가 내미는 푸른 손을 잡고 싶고, 팍신팍신한 흙에 발바닥을 부비고 싶다. 판판한 그루터기에 앉으면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뺨을 어루만져주면 좋겠고, 굵은 나무둥치에 등을 대면 늙은 고목이 등짝으로 푸른 숨을 불어넣어주면 좋겠다. 흙길에 피어난 작고 어여쁜 꽃들이 나를 보고 웃어주면 좋겠고,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들이 내 귀에 부리를 대고 조잘거리면 좋겠다. 그렇게 숲에선 몸과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 


숲이 좋은 이유는 초록 때문이다. 초록은 나를 지치지 않게 한다. 시인 이상은 초록을 권태롭고 공포스럽다고 했지만 나는 초록에 질려본 적이 없다. 나무와 풀의 초록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잎마다 풀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초록이다. 세상에 이토록 다채로운 자연의 색이 있을까.     




조용한 숲에서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알려주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제주도의 한남삼나무숲이다. 사실 한남삼나무숲은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곳이다. 하긴 제주도에는 좋은 곳이 워낙 많아 내가 추천한다고 해도 그 숲이 갑자기 유명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남삼나무숲은 산림청에서 관리하며 매일 일정한 인원만 탐방할 수 있으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제주도의 삼나무숲이라고 하면 한라산 동쪽에 있는 사려니숲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사려니라는 어여쁜 이름은 ‘신성한 곳’이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 ‘살안이’ 또는 ‘솔안이’에서 나온 말이다. 한남삼나무숲은 넓게 보면 사려니숲의 일부로, 사려니숲의 남쪽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다. 사려니숲은 누구나 언제든 들어갈 수 있지만,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가 연구시험림으로 관리하고 있는 한남삼나무숲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돼 하루에 300명만 들어갈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탐방이 가능하며, 숲해설도 진행한다. 


오로지 숲을 보기 위해 떠난 제주여행은 처음이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숲해설 예약까지 한 뒤 한남삼나무숲 탐방안내소에 도착하자, 탐방객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가려고 했지만, 해설사가 곧바로 안내를 시작해 부랴부랴 따라갔다. 입구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니 몇 발짝 지나지 않아 키 큰 삼나무들이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하늘로 곧게 뻗은 굵은 직선들은 시원한 눈맛을 선사했다. 



제주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벌거숭이가 된 산에 삼나무를 심었다. 삼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라고 키가 커 강한 바람으로부터 감귤밭을 보호하는 방풍림 역할을 했다. 제주도에서는 쑥쑥 잘 자라는 삼나무를 ‘쑥대낭’이라 부른다. 요즘은 너무 잘 자라는 삼나무들이 오히려 감귤밭의 햇빛을 가려 문제가 되고 있다. 해설사는 키 큰 삼나무들이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고 생태계 다양성을 해쳐 요즘은 간벌을 하는 삼나무숲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한남삼나무숲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도 남아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 울타리처럼 이어진 검은 돌담, 제주 전통가옥의 대문 역할을 하는 기다란 정낭, 과거 화전민들이 쓰던 방앗돌과 숯가마터. 이런 흔적들은 삼나무숲을 더욱 제주스럽게 만들었다. 



탐방을 할수록 숲은 점점 더 깊어졌다. 2㎞ 정도 숲길을 걷다 보니 한남삼나무숲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삼나무 전시림이 나왔다. 1960~1970년대에 심어진 다른 삼나무들과 달리, 전시림에는 1933년 일본 아키타현에서 들여온 종자로 국내에서 처음 심은 삼나무 1850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이 80년이 넘은 나무의 높이는 평균 28m, 직경은 1m에 이르는데, 나무 사이엔 데크로 된 탐방로가 설치돼 있었다. 


하늘로 쭉쭉 뻗은 굵은 나무 사이에 서자 이전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원시림의 짙푸른 기운이 몸을 에워싸는 느낌이랄까. 왠지 신성한 분위기마저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멀리 빗살 모양의 푸른 잎 사이로 햇빛이 들고 있었다. 


넓은 숲에는 20여 명의 탐방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탐방객들조차도 조금 있으니 하나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해설사의 해설이 전시림 입구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전시림을 잠시 둘러본 뒤 돌아나갔다. 



숲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이렇게 좋은 숲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니. 사진을 찍을 만큼 찍은 뒤엔 오롯이 숲을 즐기고 느꼈다. 두 팔을 벌려 나무를 안고 나무에 뺨을 댔다. 나무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을 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나무들이 내뿜는 푸른 숨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벤치에 앉아 가만히 나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든 살 먹은 키 큰 고목들이 느릿느릿 말을 걸어왔다. 그저 나무처럼 살아도 된다고, 나무가 되어 제자리를 지키며 푸르기만 해도 된다고, 뿌리를 어디로 뻗을까 이리저리 뒤틀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흙속에 박은 뿌리를 더 단단하게 키우면 된다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싱그러운 초록으로 물들었다. 


전시림에서 한참을 머물다 이번엔 오름으로 향했다. 한남삼나무숲에는 사려니오름과 거인악, 멀동남오름이 있는데, 전시림을 지나면 나오는 사려니오름에 올랐다. 30분 정도 산을 오르자 사려니오름 전망대가 나타났다. 전망대에서는 삼나무숲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모 모양의 푸른 머리를 촘촘하게 맞댄 광활한 삼나무숲을 내려다보니 마치 북유럽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선물이 이어졌다. 420개의 나무계단 양옆으로 도열한 삼나무들이 다시 한 번 푸른 숨을 불어넣어줬다. 



오전부터 해질 무렵까지 숲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무들이 내 몸의 나쁜 기운을 모두 가져간 덕분일까. 숲 입구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욕구가 숲에서 나온 다음에야 다시 살아났다. 생리현상까지 잊게 만든 그 숲의 초록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속에서 푸른 무언가가 돋아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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