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돌이

오늘도 소심해서

by 수호

평화로운 일요일이다. 과외를 위해 창신으로 향하면 숭인 교회에선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썩 달갑진 않다. 숭인교회를 지나 보문 이편한세상으로 향한다. 차도에 횡단보도는 유의미하게 존재하진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그곳을 지난다.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당근 거래하기로 했다. 값싼 가격만큼이나 질도 하락해있던 옷이었다. 싼마이로 입는다는 느낌으로 갖고 왔다. 이따가 있을 소개팅에 제목만큼이나 난 소심했고 소극적이었다. 나름 편해져서 할 말 가리지 않고 했는데 사실 이게 더 안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녹차라떼 따뜻하게 시켰는데 아이스가 나왔다. 음, 생각하다 그냥 먹었다. 그렇게 얘길 하다가 시간이 돼서 나갔다. 아직 녹차라떼가 반이나 남은 잔을 정리하는 그에게 난 선뜻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거 먹을 건데. 왜 그 말이 안 나왔을까. 돌아가면서 남은 녹차라떼가 생각났다. 처음부터 테이크아웃잔이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종이컵으로 나오면 다 테이크아웃처럼 보인다. 어쨌든,


그리고 오늘 그에게 친구로 지내자는 문자를 받았다. 친구, 친구 좋지. 암.


소심인으로서 살아가는 건 힘들다. 세종대에 수많은 인파가 있었는데 다들 지창욱 배우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 행렬처럼 멋진 포즈를 지으면서 사진 찍을 수 있을까. 나이 불문하고 밝은 표정의 아주머니들은 소녀처럼 보였는데, 청년인 난 소년과 거리가 멀어진 기분이다.


나도 분명 소년이었었는데, 지금은 소년이었던 모습마저 사라지고 감정도 사라진 기분이다. 눈치 보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데. 표현하는 데 있어 난 소극적이 됐고 주저하게 됐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거에 겁을 먹는다.


과 동아리에 들어갔다. 18학번인 내가 일개 부원으로 들어간 건 스스로 눈치가 보였다. 회장뿐 아닌 동아리 부원들은 다들 학번이 2로 시작됐다. 1로 시작하는 건 내가 유일한 듯했다. 나에게 극존칭을 붙이는 후배들을 보니 부담스러웠다. 선배님이라니,, 내가 뭘 했다고.


후배님들은 참새 같았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모습이 꼭 참새처럼 귀였으니까. 동아리 활동이 끝나면 다들 어디 갈까, 뭐 먹을래 등의 얘기를 했던 거 같다. 물론 나에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차례가 지났고 한번은 축제 기간이었다. 비비가 오는 날, 어떤 후배가 내게 비비 보러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 예정이었기에 그렇다고 했다. 안 간다고 했다가 마주치면 뻘쭘할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든 다 같이 보러 가게 됐다. 내가 꼽사리를 낀 게 아닐까, 계속 걱정도 들면서


공연이 끝나고 나가는 길은 인파가 복잡했다. 한 부원은 기숙사를 같이 가자고 했었고 나는 좋았었다. 같이 갈 사람이 생겼다니. 인파가 복잡했던 행렬 사이에서 우린 찢어졌다. 어쨌든 난 출구 밖에서 5분 정도 기다렸다. 음, 먼저 나갔나 싶기도 하고. 앞에서 기다리나 한참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카톡도 살펴보고. 아무 연락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향학로를 걸어갔다.


내내 든 생각은 낄낄빠빠였다. 요즘은 이런 말 안 쓰나. 어쨌든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나, 눈치가 없었나, 화석은 화석답게 있어야 하나. 어우, 쓰다 보니까 좀 그렇네. 군대 갔다 왔더니 갑자기 고학번이 된 서러움을 내가 느낄 줄은 몰랐다.


그 후로 거리를 두게 됐다. 거리를 뒀다고 말하긴 좀 애매하긴 하다. 솔직히 내가 먼저 다가선 적도 없고 다가온 사람도 없으니까. 속으로 거리두기?


한번은 회식했다. 활동이 끝나고 다들 회식 얘기, 술 얘기에 들떴고 난 건물을 빠져나올 때까지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아무도 내게 안 물어봤으니까. 그러다 건물 밖에 나왔을 때 누군가 물었다. 교수님 회식도 갔는데 저희 회식도 가실 거죠?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난 이대로 혼자 기숙사를 가야하나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난 술도 담배도 다 끊은 상태였다. 가도 할 게 없었다. 친해지려고 간 회식인데 사실 잘 모르겠다.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난 데면데면하다.


다음번 활동이 끝났을 때도 부원들은 뭐 먹을지에 대해 연신 떠들고 있었다, 서브웨이, 맥도날드 대충 그 두 개로 갈렸던 거 같다. 그날 난 저녁을 못 먹었었다. 한성대에서 오디션을 봤고 급하게 학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금요일이었던 탓인지 차가 진짜 더럽게 막혔다. 한성대에 갈 때도 네이버 지도에선 4:33분으로 떴던 도착 시간이 한성대 도착하자 5시 조금 넘은 상태였다. 30분을 억까 당한 거 같아서 억울했다. 오디션의 내용은 액팅 위주의 정말 생소한 상황이었다. 잘 못 했던 거 같다. 저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달라서, 라고 운을 뗀 답장을 받았으니까.


뭐, 어쨌든 난 오디션장에서 받은 오예스를 하나 먹은 상태였다. 혹시나 배고플까 챙긴 곤약젤리도 먹었고. 생각하니 공복은 아닌 상태네. 그래도 끝나고 배고프긴 했다. 그때 고민했던 거는 뭘 먹을까이기도 했지만 빨리 가서 씻고 싶다였다. 강의실 바닥에 눕고, 그랬으니까. 오디션 얘기다.


어쨌든 아무도 내게 묻질 않은 채 건물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물었다. 갈 거냐고 물었던 거 같은데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그래서 인사를 했고 난 기숙사로 향했다. 와서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견과류를 먹고 사과를 먹고. 그래도 배고파서 배고프다고 말하니 룸메가 밥을 먹으라고 했다. 방금 있었던 얘기를 룸메에게 하니 룸메 왈, 동아리 왜 들어간 거야.


사실 내가 먼저 다가가며 된다는 가장 쉬운 정답이 있는데, 그게 참 어렵다. 어쩌면 그냥 겁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 모르겠다. 이불 밖은 역시 위험하다. 이불 안에 박혀서 넷플릭스랑 유튜브만 본다면 세상은 평화로울지도 모르겠는데. 넷플릭스를 끊어놓고 몇 달째 영상 하나도 보지 않고 있다. 슬슬 돈 아깝다.


오늘은 알람을 듣지 못했다. 아침 먹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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