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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시(詩)

by 수호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음표 하나로 시작한 의문을 통해 그렇게 난 진로를 찾으려고 했다. 정작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나는 너무도 소극적이었으니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입시생이라는 처지가 실감 났다. 아니지 정확히 4월에 느꼈었지. 이대로라면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둘 다 놓칠 거라는 걸. 그래서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걸 허겁지겁 시작했고, 그게 시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4월이 되어서야 실기를 준비했다는 점이다. 늦었다면 늦은, 어중간하다면 어중간한, 그런 모호한 시기에 말이다. 사실 그전부터 간간이 백일장에 참여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건 기숙사에 있기 싫어 저지른 도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백일장을 꺼린 건 아니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도의 길을 걷는 또래를 만난다는 건 늘 새로운 경험이자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나아가 시 말고도 소설과 수필, 예술에 흥미가 있던 나이기에 이런 내가 좋아하는 건 당연히 책이었고, 국어국문학과를 지향하며 학교생활에 충실히 임했다.

그나마 국어가 성적이 좋았던 나는 잘하는 게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특정 과목 성적이 높으면 그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대개의 학생처럼, 나도 다르지 않았다. 국어를 잘해 국어교사를 지향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양의 후예>가 인기를 끌자, 그해 육군사관학교 경쟁률이 올라간 것을 보자. 이것이야말로 당대 청소년들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난 국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다른 과목에 비해 조금 더 성적이 높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남진우나 한강 같은 분들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먹고는 살아야지, 현실적인 게 잘못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 그러던 중, 어느덧 여름이 되었고 보성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거기서 이병일 시인을 만났다. 짧은 시간이었고 백일장 후로 연락해 본 적 없으나, 하루 남짓한 시간 동안 나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 중간에 재직 중인 학교를 옮겼다고 들었지만, 그는 나에게 멘토이자 선배님이었다. 그는 어느 대학의 무슨 과를 가는 게 중요하지 않고, 진짜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을 잘 가는 게 어느 순간 목표로 전락해버렸던 어제를 상기했다. 내일을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짧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대학 간판이 우리 사회에서 왜 중시되는 건지, 우리 사회의 기반을 형성한 어른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시에 전념했다.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배우며, 많은 책을 읽어가며, 그러자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광대 백일장에서 장려상으로 입학하였던 내가 대구대 백일장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 동국대 실기를 앞둔 일주일 전, 드디어 나만의 시를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도 실기 준비생으로서 나쁘지 않은 실적이라 여긴다.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나를 보니 무척 뿌듯했다. 그걸로 만족한다. 어차피 지레짐작으로 눈치챘다. 내가 뭐 결과를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일찌감치 학생부종합을 같이 준비했었다. 8월부터는 백일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맘때 난 멘토의 말을 기억하며, 문예창작학과, 그리로 정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나만의 기치를 내세웠다. 유일하게 수시 원서 6개 중, 명지대학교에만 국어국문학과로 제출했다. 특기자전형을 낼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고, 국문학과에 들어가 문창과에 복수전공이나 전과를 하려고 했다. 이런 나의 의지는 끊어지지 않고 끝내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타협안은 다른 과(취업이 잘 되는)에 복수전공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3학년에 진급하기 전에, 모교 안동중학교를 찾아갔다. 친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좋아했던 역사 선생님이 계셨다. 은사께서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셨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는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아마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학교생활기록부 쪽수에서 난 이미 여과되었을지도 모른다. 봄부터 여름까지 한, 짧은 봉사지만 이것이 나의 자소서 3번이 되어주었다. 이후에 일이지만, 3번 문항은 끝내 봉사가 아닌 학급에서 회계를 맡던 중, 일어난 사건에 관해 기술하였다. 그렇지만 여러 능동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그중에서 나를 드러내기 가장 좋은 소재를 고를 수 있지 않았을까.

흔히들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한다. 입학사정관제도 때부터 자기소개서는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유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학생부종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어도 문제점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논술만큼이나 주관이 많이 개입된다는 것은 하릴없다. 이런 측면 때문인지, 학생부종합전형의 축소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영향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혜화역 시위가 우리에게 순기능을 가져다주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학생부종합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몰랐던 장점이나 흐릿했던 진로에 또렷한 초점이 생긴 학생들도 있다. 자기소개서가 100% 진실이라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를 자기 것으로 녹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써야 할 사람으로서, 또 학생의 본분으로써.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냈던 전공우수자전형이 1차에 붙고 2차 면접을 준비할 때였다. 자소서와 생활기록부. 그 이면의 것들, 즉 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시사 문제를 살펴보게 되고, 안동에 대한 이야깃거리도 알아보았다. 여러 인터넷카페의 면접 후기를 읽었고, 친구들끼리 모의 면접을 하는 모든 과정이, 나를 성장하게끔 도와주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나에 대해 알아가면서,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쓰시마 유코처럼 나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자소서 4번은 대학마다 달랐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경우, ‘모집단위 관련 지원 동기와 진로계획을 위해 어떠한 노력과 준비를 했는지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로 1000자 이내였다. 나는 바칼로레아 공부한 것을 자소서 4번에 녹여냈다. 면접이 다가왔을 때는, 질문에 대비하여 다시금 공부해야 했다.

면접이 거의 끝나갈 때쯤, 면접관은 나에게 바칼로레아에 대해 질문했었다.


바칼로레아를 공부했다고 적혀 있네요? 기억에 남는 거 하나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네. 종교적 믿음이란 이성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했던 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델리술탄 왕조가 인도를 지배할 때, 지즈야(인두세)를 인정해줌으로써 힌두교인들의(힌두교도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준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용이었고 인간의 이성을 위하는 행위였기에······.


면접관은 나의 답변을 정리해주며 시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갔고 그다음 어느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짧고도 길었던 10분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경기대 면접을 한 번 경험하긴 했지만, 떨리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면접 때보다 분명 나아진 게 느껴졌다.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그로 인해 최초합격이라는 행운이 따랐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저의 시야를 넓히는 것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건 독서였습니다. 그 일례로는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생활과 윤리 과목에서 자주 언급되는 안락사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안락사에 대한 선입견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간 결국 안락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 비포 유>의 주인공인 ‘윌’에게 있어서 안락사는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윌’이 만약 저였더라도 삶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고, 저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 휠체어 스프린트 선수 ‘마리케 베르보트’의 일화를 읽게 되었습니다. 2012 런던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그녀는 2016 리우 패럴림픽을 끝으로 안락사할 것을 밝혔고, 결국 본인의 소신을 따라 생을 마쳤습니다. 그녀에겐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금메달만큼 값진 보상이 안락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미 비포 유>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누군가를 헤아리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아야 했습니다. 생활과 윤리 과목에서 숱하게 던져지는 물음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자소서 2번의 첫 내용이다. <미비포유 Me Before You>는 ‘안락사는 존엄사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화제의 소설이다. 시를 공부하면서, 성과를 거두었던 것들이 자존심을 키워주었고, 좋아하는 것에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쓸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면접관은 별 감흥이 없었지만, 어떤 질문이든 난 대답할 자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글이기도 했다. 시를 선택했던 나에게 수필은 그저 버거웠다. 특히 나는 이야기 시(산문시)를 써왔다. 시 한 편에 단편소설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줄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말이다. 내 삶이 하나의 소재가 되는 것은 낯설고도 어려운 주제였다. <미비포유>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 있는 글을 쓰는 건 마찬가지로 부담이 됐다.


교실 뒤편에

언제 씨를 뿌린지도 모르는 것이

좁은 땅에서 싹을 틔웠다

참고서를 찢어

비료 대신 뿌려 주고

목이 마른 싹들은

물기 묻은 밀대 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마른 뿌리들로

세상을 휘둘러보지만

아득한 것은 담이었다

꽃말 하나 가지지 못한 잡초가 돼

커다란 발길들에 짓밟히는 수모를

견뎌내면서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그리운 담 너머의 세상이었다

수많은 발길질 받아가며

오랜 기다림 끝에

담에 이르러

능소화 한 송이로 피어나

비로소 꽃말을 되찾게 되고

교실로 들어간 능소화는

학생들의 책갈피 속에 향기를 꽂아 넣는다


제47회 대구대학교 전국 고교생 문예작품 현상공모전 2등을 한 ‘꽃말’이라는 제목의 시다. 서정시를 쓰는 것은 5대5 가르마처럼 용기가 필요했다. 정작 쓰고 나니까 별거 아니었다. 처음만 어렵다는 어른들의 말이 백 번 옳았다. 기세를 몰아 서정시까지 쓰게 되었는데, 수필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을까. 그 후로 자소서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9월에 공모한 대구대 백일장은 동국대 실기 조기 발표와 겹쳐졌다*. 학생부종합과 병행한 실기는 내게 좋은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다. 아쉬웠다. 아니 자책을 했던 것 같다. 미련은 꼬리를 물고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능소화의 꽃말처럼 ‘기다림’인 줄 알았다. 그런 기다림에 한줄기의 물을 뿌려준 것이 자기소개서였다. 쓰시마 유코가 슬픔을 소유했듯, 나는 나를 소유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누가 빵과 우유를 주겠는가.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주저하는 것은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온 지금의 난 다채롭고 풍부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당연히 시를 포기한 건 절대 아니다. 신입생 동기와 함께 시 스터디를 꾸렸고, 동아리 활동이며, 도서관에 들러 시집을 꾸준히 독파하고 있다. 내 지론은 ‘뱉은 말은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 바로 그게 나에 대한 예의와 사명이다. 고삐 풀린 나의 몹쓸 말이 돌아다니는데, 주인이 가만히 있어서 되겠는가. 내 생활기록부에 3년 내내 적혀 있는 진로희망 속 시인.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선배의 추천을 받은 시동인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고, 고로 신인상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것이 내가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면서 얻어낸 거짓말 같은 성과다.

면접 마지막에 있었던 일화다. 면접관은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나에게 묻었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강물은 알고 있어,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나는 간에 결국엔 아름다운 바다에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니? 결말은 늘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팀 보울러의 <리버보이 River Boy>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용문을 말하면서, 아름다운 결말을 기억하겠다고 했다.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듯했고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사실 저 구절 밑에는 내용이 더 있다. 이제는 이 구절의 뒷부분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학생부종합뿐 아닌 모든 수험생과 학생들을 위하여.


“삶이 항상 아름다운 건 아냐 강은 바다로 가는 중에 많은 일을 겪어, 돌부리에 채이고 강한 햇살을 만나 도중에 잠깐 마르기도 하고, 하지만 스스로 멈추는 법은 없어, 어쨌든 계속 흘러가는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야. 난 그 모습을 볼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




*주석


신석정, <들길에 서서> 中 (슬픈 목가)


김재현, '중3 대입' 정시 30~40% 전망…학종 줄고 교과 확대될 듯‘, 뉴스1코리아.


삶에서 큰 가지가 갑자기 잘려나갔던 시기에 썼다고 하는 사소설 『묵시』에 수록된 「욕실」과 「슬픔에 관하여」를 통하여 슬픔 극복 과정에 관해 서술한다. 그 슬픔을 인정하고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벗어나는 것으로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과정이 담겼다.


‘사실 대구대 공모전에서 수상자 발표가 나는 날, 우연히 동국대 실기 조기 발표 날이었습니다.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었고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너무 아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기대 면접이 그 주 토요일이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한 주에 겹쳤습니다.’ -대구대학교 청년문화진흥원 2017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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