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이 지나도 웰메이드 스릴러
꾸준히 시리즈로 제작되는 SF 영화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원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예전부터 꼭 봐야지, 봐야지 말만 하던 <에일리언>을 이번 기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예전에 봤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시간상 더 이전을 다루고 있는지는 몰랐다.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하여 몸을 찢고 태어나는 외계 생명체라는 소재가 뇌에 충격적으로 각인이 된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외계인이 처음 등장한다는 <에일리언>에 대한 기대도 꽤 컸다.
<에일리언>은 SF 소재를 사용하지만 본질적으로 공포 스릴러 영화이다. 무서운 크리쳐가 등장하고 인간이 그것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공포의 감정이 주가 된다. 그래서 장르적 재미 이외에 큰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가볍게 보았다. 공포영화를 좋아하고 잘 보는 편이기 때문에 영화가 무섭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2023년의 관객으로서 공포영화의 클리셰가 막 대두되던 시기의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뻔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현대의 공포 영화와는 너무 다른 연출법을 사용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걸 비교하는 맛으로 관람을 했던 것 같다.
뻔했던 지점은 리더의 말을 듣지 않거나 단독 행동을 하는 자, 쓸데없이 호기심이 큰 자가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단독 샷을 오래 잡히고 있으면 이번에는 얘 차례겠군(ㅎㅎ) 하며 마음 편히(?) 인물을 보내 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예상이 빗나가지 않고 차례로 죽었다.ㅋㅋㅋ 에일리언에게 당하는 사람은 모두 멍청한 실수로 인해 죽는데, 하나같이 남성 캐릭터들만 그래서 조금 웃겼다. (물론 여성 캐릭터 비중이 거의 없기 때문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에 비해 리플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책임감을 가진 리더로 표현되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이자 생존자는 여성과 고양이(!!)라는 점에서, 젠더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능함을 풍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79년작임을 생각하면 굉장히 진보적이다.
그리고 색다르게 느꼈던 점은 영화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담백하다는 점이다. 인물이 에일리언에게 당하는 순간 그리고 긴장감을 고조하기 위한 짧은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배경음도 없이, 카메라 앵글 변화도 없이, 아주 느릿하고 조용하게 진행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볼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일종의 ASMR 영화(ㅋㅋㅋ)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분위기에 스릴러를 접목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연출인 것 같다. 공포영화는 무서운 것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을 때도 무섭게 만들기 위해 신경을 긁는 사운드트랙이나 인물의 표정과 감정에 몰입할 수 있을 만한 과한 연출을 들이붓는다. 그러나 <에일리언>은 대체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에이리언이 공격하기 직전의 직전까지도. 마치 눈을 감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다. 클리셰적으로 흘러가는 전개 상 곧 무서운 장면이라는 것을 알지만 (롤러코스터가 올라가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언제 튀어나올지는 전혀 예측이 가지 않는다. (급강하 구간이 언제 나올지는 모른다). 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오히려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던 가장 큰 이유는 리플리라는 주인공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으나 왠지 어릴 적부터 ‘에일리언에 엄청 멋진 여성 주인공이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리플리의 이미지는 어떤 시련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성숙하고 대담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뽀글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당연히 중년 정도겠거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다. 화면에 잡힌 리플리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어렸다. 고작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언니였을 뿐이다. 그녀는 최후의 생존자로서 다른 캐릭터보다 확실히 성숙한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다. 그녀는 초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본인도 덜덜 떨고, 무서워 죽겠고, 일행들을 잃어가는 게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해야 하니까 해내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였다. 남은 일행들의 리더가 되어 행동을 지시할 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와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최대한 침착하고 분명한 말투로 전달한다. 원래 강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만 하는 사람, 강함을 연기함으로써 강해지는 사람을 연기하는 시고니 위버 배우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영화의 후반부는 리플리 원맨쇼라고 할 만큼 배우의 연기가 중요했는데, 비슷한 플롯이 반복되고 자칫 지루하고 지칠 만한 시점인데도 시고니 위버의 섬세한 연기가 더욱 몰입감을 극대화해 주었다.
리플리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서 계속 활약하니 1보다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2편은 꼭 보지 않을까 싶다. 외계인의 디자인도 좋았는데, 79년도 기술의 한계 상 소품인 티가 나서 조금 깨긴 했다. 최신 CG로 실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지 못한다면 너무 아까운 디자인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봤으니 후속작인 커버넌트도 보고 싶다.
+) 고양이가 귀엽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에 고양이를 데려가는 건 합리적 이유는 없고 귀엽기 때문인듯. 내가 몇 십년 동안 우주로 나가 있는데 키우는 고양이가 있으면 어떻게 지구에 두고 가겠어!!.. 고양이를 귀여운 마스코트로 잠깐 쓰다 마는 게 아니라 끝까지 챙기려는 노력을 보여줘서 너무 좋았다.. 작은 동물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자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