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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토 Mar 25. 2024

[책] 유년기의 끝 (1953)

오타쿠라면 고전을 읽읍시다.


확실히 SF고전은 서브컬쳐 장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놀랍게도 큰 유사성 때문에 에바를 빼놓고 리뷰를 쓰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년기의끝보다 에반게리온 얘기를 많이 하는 리뷰가 완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 막 합니다. 안 보셨으면 어쩔수없죠. 90년대애니인걸.



책의 마지막에 추가된 해설에서도 곧바로 에반게리온이 인용된다. 몇 달 전 오리지널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엔딩이자 극장판인 1997년작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통칭 ‘EoE’라고 부르겠다)이 처음으로 한국 극장 개봉을 했었다. 고어한 묘사와 충격적인 전개로 유명하지만, 영화에 담긴 메시지는 훨씬 깊고 심오하다.



<유년기의 끝>은 에반게리온에 직접적인 모티프가 된 작품으로 보인다. EoE의 ‘인류보완계획’은 곧 <유년기의 끝>에서의 인류의 종말, 즉 모든 인간들이 형체를 잃고 하나의 정신체로 통합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개념이다. EoE에서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하려는 세력들은 (=제레) 일종의 종교적 광신도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이 개별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지만, 더 진화되고 완전한 최종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멸망이 아니라 축복이다. 책 속 오버로드들도 비슷하다. 이들은 인류의 멸망을 진정으로 돕는다. 우리의 끝을 너무나도 부러워하며.



영향받은 작품을 영향을 준 작품보다 먼저 보았기 때문에 시간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비교를 하게 된다. 에반게리온의 제레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버로드들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버로드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애초에 다른 존재라는 전제 하에서는 오히려 인간과 비슷한 면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오버로드가 꽤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른 외형, 다른 생활 방식, 매우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졌으나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인간처럼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인류의 진화를 이끄는 존재가 인간 내 인간답지 않은 집단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왠지 이 버전의 ‘인류보완계획’은 그럴싸해 보였다.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넓은 관점에서 조망하게 된다. 우주적 관점에서는 개인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닐까. 개인의 종말은 불행이 아닐 수도 있을까.



EoE에서 인류보완계획은 결국 실행되고 모든 인간이 태초의 형태, LCL의 바다 속에서 하나가 된다. 장엄하고 섬뜩하면서 아름다운 인류의 최후이다. 그리고 <유년기의 끝>은 여기에서 끝난 에반게리온이다. 


오직 개인들만이 외로울 수 있었다. 오직 인간들만이. 마침내 장벽들이 내려졌을 때, 외로움은 인격이 사라지듯 사라져 버릴 터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빗방울들이 바다로 합쳐지듯.


<유년기의 끝>에서 가장 에반게리온을 떠올리게 했던 문장이다.

이처럼

감정은 불완전하고 서로를 상처입힌다. 

나와 너의 다름이 각자를 불행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가 될 때 더욱 완전해질 수 있다.

서드임팩트가되.


서드임팩트가 일어나듯 <유년기의 끝>에서 아이들이 하나가 되어 위로 올라갈 때, 어떤 어른들도 저항하지 않았다. 무력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어떤 인물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인 나도 같이 혼란스러워진다. 분명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인지부조화에 시달린다.



만약 내가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고 유년기의 끝을 먼저 읽었다면 이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작가 아서 C 클라크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종말의 형태를 한 진화를 그는 긍정적으로 본 것일까, 부정적으로 본 것일까. 작가의 스탠스는 굉장히 모호하다. 그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관조하듯이 서술한다. ‘인류의 유년기의 끝’을 종말로 볼 것인지 진화로 볼 것인지,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지구를 펑 터트리며 끝낸다. 그래서 영 찝찝하고 불쾌하다.



에반게리온은 작가가 남겨둔 이 공백을 확실히 메운다. EoE의 끝은 멸망이 아니라 멸망으로부터 회복의 가능성이다. 한 사람의 의지로 인류보완계획은 완수되지 못했으며, 폐허가 된 세계에서 소년과 소녀 둘은 육체를 가진 채 살아남는다. 또다시 상처입히게 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가 왜 개인으로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역설한다. 여기에서 ‘오버마인드식 진화’는 옳지 않다. 에반게리온의 이 메시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년기의 끝>은 나에게 절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인류라는 종이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 아닌, ‘인간적임’이 종말을 맞은 세계이기 때문에. 



에반게리온은 <유년기의 끝>의 훌륭한 재해석이지만, 재해석을 먼저 접한 것은 답지를 먼저 보고 문제를 읽은 듯한 느낌이다. 답을 알기 때문에 질문을 던져 본 적은 없다. 이 소설은 당연하던 해답에 거꾸로 묻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운이 남는다. 이 책을, 문제를 먼저 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어떤 답을 내렸을지 궁금하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소설을 읽은 것은 영광이었다. 에반게리온을 예시로 들었지만 <유년기의 끝>을 검색해 보면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들이 한둘이 아니다. 오타쿠로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담긴 원초적인 질문을 하는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원본과의 비교는 작품을 더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 오래된 작품은 시대적 한계, 아이디어의 첫 발상자로서의 한계가 있지만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콘텐츠들이 어떤 방식으로 고전을 발전시켜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여러분 그러니까 고전을 읽읍시다. 비단 SF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모든 장르물은 그 장르의 시조격인 작품의 복제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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