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가 발휘하는 흡입력
나는 SF 단편을 좋아한다. SF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고, 그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편은 장편에 비해 세계관을 설명할 분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처음부터 익숙하지 않은 세계의 한 단면으로 독자를 내던져 놓고, 알아서 세계를 파악하도록 한다. 제한된 분량-시간 내에 단서를 스스로 찾아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것이 마치 방탈출게임 같기도 하다. 짧은 분량 안에 그 단서들을 재미있게, 풀어내기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배치하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다. 그래서 단편을 쓰는 작가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작가를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70~90년대에 활동한 흑인 여성 SF작가라는 타이틀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SF가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오래전의 일이 되었고, 현재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장르는 한국 여성 SF문학이지만, 그녀들이 있기 전에, 지독한 백인남성중심의 업계에서 직접 맞부딪히며 싸워온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감회가 새로웠다. 요즘의 소설보다 더 투쟁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담아낸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한편으로 또 그녀를 성공한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라는 타이틀이 아닌 그냥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단편집 <블러드차일드>에 실린 그녀의 에세이에서 그녀는 그저 SF가 좋아서, 장르가 담아내는 상상력과 창조력이 좋아서 글을 썼다고 한다. SF를 쓰는 것이 흑인으로서, 흑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어떠한 강요가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정체성을 글을 읽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맥락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정체성을 글의 전부로 여기지 않기란 참 어려운 것 같다.
<블러드차일드>에 실린 단편들은 짧은 글이 주는 몰입감과 전혀 모르는 세계가 어느 순간 한 눈에 전체 윤곽을 드러내는 쾌감이 상당한 글이었다. 단편집 중 인상깊었던 3편의 글에 대한 후기를 남겨보고자 한다.
신선한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틀릭’과 ‘테란’이라던지, 너무나 생소한 고유명사들의 향연으로 내가 무얼 읽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뇌에서 미끄러지는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느 순간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끼워 맞춰지면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하여 태어나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에일리언>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지만 인간과 외계인이 이렇게 잔인하지만 합리적인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라니, 정말 독특한 발상이다. 인간의 몸을 찢어 유충들이 태어나는 장면은 처음에는 그로테스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현실의 임신과 출산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이 세계의 형태 그리고 트가토이-주인공 사이 관계와 감정에 설득되어갈수록, 현실의 임신과 출산이 뱃속에 기생충을 키우는 듯 낯설게 보이는 동시에 인간 남성이 외계인을 ‘낳는’ 끔찍함이 자연스러운 생명 탄생의 연쇄로 보이는 기분이 너무 묘했다… 주인공이 트가토이의 아이를 품게 되는 장면이 에로틱하면서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본격 이상성욕유도하는 소설…) 작가는 이 글이 남성이 임신을 선택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했는데, 그래서 그저 임신의 끔찍한 면을 지각시키기 위해 글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랑의 본질은 끔찍한 자기희생이라는 실체를 알면서도 그걸 거리낌없이 선택하게 되는 이 시스템 전체의 기이함을 조명하려던 게 아닐까. 이래서 좋다, 나쁘다가 아닌 ‘이거 이상한데 한번 생각해 봐.’ 이런 느낌. 그래서 찝찝한 기분이 오래 갔다…
세상에는 별의별 소재의 디스토피아물이 있지만 ‘인간에게서 언어를 뺏는다면?’ 이라는 설정은 어디에서도 못 본 것이었다. 사회는 급속도로 붕괴하고 법과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과 글을 잃어버렸을 뿐인데, 아무리 자신만의 지적 세계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무와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좀비 아포칼립스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매 순간이 생존을 위한 싸움이고 의심의 연속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조금이나마 뜻이 통하는 존재, 상대를 믿어도 안전한 짧은 순간이 있는 것만으로 싹트는 사랑이 아름다웠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상대와 마음을 표현할 방식은 육체 관계밖에 없는데도, 이 야만적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다니… 희한하다. 이게 바로 작가가 자신이 만든 세계를 독자에게 설득시키는 능력이겠지. 인간은 참 쉽게 희망을 가지는 존재 같다. 이렇게 절망뿐인 세계에서까지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를 믿어 보고자, 조금 더 나아진 미래를 그려 보고자 하는 것이… 그 희망조차 부질없다는 듯이 현실은 곧바로 반격해 온다. (옵시디안이 그렇게 허무하게 갈 줄 몰랐다. 그게 그 세계의 당연한 현실인데도.)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만나는 결말은 조금 뻔하다고 느껴졌지만 마지막에서라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여주지 않으면 너무 잔인해지니까… 이러한 결말을 택한 이유는 가늠이 간다. 디스토피아나 아포칼립스물을 쓰는 것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큰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에 매달리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정말 컨택트 생각이 많이 났다. 다른 존재를 무턱대고 배척하기 전에 그들의 언어를 배워! 대화를 좀 해!! 주인공 노아의 대사를 통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외치고 싶었을 만큼 작가의 울분과 답답함이 녹아 있었다고 할까. 인간의 삶의 터전에 침입한 것은 외계인들이지만 인간을 불신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갖은 방법으로 고통을 준 것은 같은 인간이었다. 컨택트에서도 외계인은 등장 이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인간들끼리 싸우고 전쟁을 하니 마니 난리가 났었지. 주인공은 유일하게 외계인과 소통하고자 했던 사람이고 그녀가 인류 전체의 평화와 화합을 이끌 열쇠를 지고 있었다. 너무 똑 닮은 구조라 테드 창이 이 단편의 영향을 받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컨택트가 5점 영화인 사람으로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 단편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특사>의 주인공 노아는 자신을 납치한 외계인보다 인간에게 더 크게 실망하고 마음을 닫을 법도 한데,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꿋꿋이 외치는 게 좋았다. 우리 제발 대화란 걸 하자… 멋대로 짐작하고 편견을 갖고 적대하기 전에 상대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좀 하자!! 비난과 매도가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나도 항상 이러한 울분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수십년이 지난 이 글로 작가와 마음이 통하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