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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토 May 20. 2024

[책] 쿼런틴 (1992)

하드 SF라고 진짜 어렵네 이거.. / 결국에는 선택에 관한 이야기.


나 하나도 이해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끝까지 보니까 왠지 이해가 갔던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하다

머리가 아픈 책이었지만 그만큼 완독한 게 너무 뿌듯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작품이라 (좋은 쪽으로 신선함) 나만 읽을 수 없어.하는 마음이 자꾸 듦..�



(나의 빅데이터에 따르면) SF에서 시공간의 구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먼저 인간의 선택에 따라서 수많은 평행우주가 생성되는 세계관이 있다. 내가 만약 A와 B 중에서 A를 선택한다면, B를 선택하는 버전의 우주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혹은 세계에는 오직 단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하고 그 현실에서 과거부터 미래까지 모든 사건은 ‘정해져 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알고 있더라도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자유의지조차 허상일지도 모른다. 두 세계관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 둘을 합친 세계관을 SF 작품에서 보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쿼런틴>이 이걸 해냈다.


일단 수축/확산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스토리를 따라갈 수 없다. 양자역학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가진 사람으로서 (이래 봬도 양자역학을 다루는 교양 과학 도서들을 꽤 읽었다.) 내가 대충 이해한 바를 정리해 보겠다. 


양자역학에서는 아주 작은 입자는 어느 시점과 위치에 정확하게 존재하는게 아니라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즉 입자가 A에 있거나 B에 있는 경우가 중첩되어 있다. 이걸 고양이만큼 큰 존재까지 확장시키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가 된다.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이게 ‘확산’의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둘 중 하나만이 현실이 된다. 이게 ‘수축’이다. 우주도 결국 아주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주 전체가 ‘확산’ 상태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주는 원래 모든 가능성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중첩되어 있는 형태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현실만을 선택하고 그 현실을 살아가도록 진화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주를 수축시켜 내가 선택한 현실을 제외한 모든 가능 세계들을 소멸시켜 버린다. 


보통 멀티버스물에서 인간의 선택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쿼런틴>에서는 원래 존재하던 가능 세계를 인간이 삭제한다는 관점이 정말 신선하다. 그러니 <쿼런틴>의 세계는 ‘하나의 현실’만이 있는 세계가 맞다는 점에서 결정론적 세계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현실로 ‘수축’하기 이전에는 멀티버스로 ‘확산’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두 세계관이 결합된 세계이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동안 확산/수축을 반복하지만, 주인공 닉은 극중에서 수축과 확산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확산된 닉은 모든 가능 세계의 닉이 중첩된 존재인데, 소설 속 서술자로서의 닉은 확산 상태에서도 하나의 기억만을 가지고 하나의 현실만을 인식한다. 닉은 서술자로서의 자신(나)과 확산된 닉(그)을 구분해서 지칭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면 무한대로 확산된 상태의 인간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조부 투파키가 이러한 존재이다. 무한한 가능 세계(평행 우주)의 자신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 확산된 닉도 이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서술자 닉은 결국 하나의 현실 안에 있는 존재이다. 확산 닉의 일부이면서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세계만을 선택하도록),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월적 존재인 ‘확산 닉’ 자체는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선택으로 또다른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고뇌하는 부분들이 흥미로웠다. 


닉은 결국에는 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수축될 것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마치 수축된 존재처럼 하나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그러나  영원히 수축하지 않고 확산만 하는 존재가 된다면 다를지도 모른다. 책의 결말부에서 현실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붕괴하는 장면은 ‘에에올’에서 에블린과 조부투파키의 결투 장면을 전세계 단위로 확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인 묘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애니메이션이나 영상화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쿼런틴 영화화 못하나요…? 이런거 좋아하는 건 나뿐이겠지…) 


책을 읽으며 평소에 하는 사소한 선택들이 가능성의 말살이라고 생각하니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 따르면 결론적으로는 가능성들이 그 자체로 중첩되어 있는 상태는 세계를 끔찍한 혼란에 빠트린다. 결국에는 이 세계를 내가 선택해야만 하고, 수많은 다른 나를 학살해가면서 선택하는 이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미 사라진 세계들을 갈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밖에서 확장된 세계가 아무리 뻗어나가고 있더라도 인간은 수축된 세계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현실이 된 세계가 좋든 나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약을 꿈꾸면서 도피하지 말고 현실을 당당하게, 담담하게 살아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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