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를 그래서 왜 나눠야 되는건데
공각기동대.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와서 겁을 많이 먹고 시작했다. 그러나 직전에 읽은 게 쿼런틴이어서 그런지, 이해하는데 머리에서 턱 걸리는 부분도 없어서 술술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인간과 사이보그, 인공지능이 어떻게 다를까,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나 자신’인가. 이러한 담론은 SF에서 충분히 많이 봐 왔다. <공각기동대>는 2024년에 와서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너무 많이 고민한 끝에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사람들이 몸 전체를 기계로 대체하기도 하고, 뇌의 일부까지도 ‘전뇌화’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 것은 ‘고스트’이다. 고스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혼이라고도, 자아라고도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고스트를 갖는다. 그 껍데기가 어떤 형태이더라도 상관없다. ‘고스트’를 상정함으로서 인간은 인간이고, 나는 나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이 세계가 유지된다. 그렇기에 ‘Ghost in the shell’이라는 영제가 영화를 훨씬 더 잘 표현하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영화에서 존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자가 등장한다. 인형사는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져 인간이었던 적이 없지만 ‘고스트’를 가진 존재이다. 고스트가 진짜 있느냐 판단할 수는 없다. 스스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다고 할 수밖에. 모든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본인의 자아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온 몸이 기계인 쿠사나기가 인간이라면 인형사도 인간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쿠사나기도 인간이 아니었나? 몸이 기계인 것은 상관이 없다면, 뇌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후부터는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와 기억의 일부를 대체한 시점에서 이미 우리는 기계와 결합된 존재이다. 뇌에 칩을 심지 않았어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이상 그렇다. 정보를 머리 속이 아닌 인터넷 상에서 찾고, 기억도 머리 속이 아니라 SNS에 기록으로 남긴다. 우리는 이미 뇌가 하는 일의 일부를 기계에 맡기고 있다. 이것이 뇌에 기계를 심는 것과 얼마나 다르지?
존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인간이고, 나는 나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근거는 어디 있는가? 애초에 존재의 경계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눌 수 없고, 나와 타인의 경계도 나눌 수 없을지도. 애초에 세계는 모든 것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인데 인간만이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고 나와 ‘다른 것’을 나누려고 한다. ‘구분짓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닌가. 내가 앞에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버린 것 같다고 언급했는데, 포기하는게 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고민을 하지 않았고 굉장히 편하게 봤다.)
왜 Ghost일까. 다른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을텐데 이렇게까지 비현실적이면서도,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유령처럼 모호한 단어를 사용했을까.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자아’라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개념인지 표현하기에 ‘고스트’가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말에서 쿠사나기와 인형사는 통합되어 제3의 존재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언가의 상실도 아니고 반대로 진화라던가 성공인 것도 아니다. 마지막의 쿠사나기의 반응을 보면, 담담하게, 어떠한 가치 평가도 들어가지 않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듯 말한다. 존재의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이고 통합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모습이라는 뜻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짓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온 관객들을 조소하는 듯하다. 고민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모호한 존재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
어떻게 보면 허무주의적인 이야기 같기도 한데, 결론을 낼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는 걸 깨닫더라도 고민해보는 것 자체는 중요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린 시절부터 SF덕후로서 이런 고민을 너무 많이 했더니 나와 어떻게 다른 존재이든지 그럴 수 있지… 하고 받아들이는 융통성이 생긴 것 같다. 인형사가 인간이라 주장해도 뭐 본인이 그렇다는 거 보니 그런가 보지 싶고. 자아라는 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란 걸 의식하다 보니 스스로도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관대해지고 쓸데없는 고집도 줄어드는 것 같다.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영화였다고 했지만 분명히 한시간 반 안에 꼭꼭 눌러담은 디테일을 다 파악하지는 못했다.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섬세한 아날로그 감성이 너무 좋고, 뛰어난 작화 구경하는 맛도 있었다. 쿠사나기 소령 너무 아름답다...
+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인형사가 하필 여성형 의체에 들어간거, 퀴어 은유도 있을듯한 ? 존재의 경계를 흐리는 자라는 특성 상... 퀴어적으로 해석하면서 영화를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