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광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커버사진 출처: EBS 독서캠페인
비영어권 영화로는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
봉준호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이자 성취이다. 그만큼 '기생충'이란 영화에는 봉준호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그런데 '사회적 주제 + 스릴러 + 코믹'은 이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첫 감독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시작해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기생충'까지 점점 세련되어지며 일관되게 이어온 '봉준호 스타일'인 것이다.
그는 새 영화 작업에 들어갈 때 늘 책을 바탕이자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한다. 인상 깊게 본 책 속 장면들을 자신의 경험과 조합하여 스스로 '어색한 조합, 불편한 뒤섞임'이라고 일컫는 '봉준호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특히 그는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으면 만화가가 되었을 거라고 말할 만큼 유명한 만화광이기도 하다. 심지어 촬영할 내용을 직접 만화 형식의 스토리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모든 것은 봉 감독님의 머릿속에 다 있다. 아이패드로 콘티를 만화처럼 그리는데, 동작 하나하나까지 디테일하게 다 들어가 있어 깜짝 놀랐다.' - 배우 최우식
새 영화의 영감을 책에서 얻고 디테일을 만화로 구현하는 만화광 봉감독. 지금부터 그의 영화의 원천이 된 인생책 10권을 살펴보자.
1. 설국열차 - 자크 로브, 뱅자맹 르그랑 / 장 마르크 로셰트
2. 프롬헬 - 알란 무어
3. 나쁜 친구 - 앙꼬
4. 블랙홀 - 찰스 번즈
5. 몬스터 - 우라사와 나오키
6. 20세기 소년 - 우라사와 나오키
7. 붉은 방 - 임철우
8. 신판 보물섬 - 길창덕
9. 대단한 돼지 에스더 - 스티브 젠킨스
10. 써니 - 마츠모토 타이요
* 읽은 책, 읽지 못한 책, 절판된 책
*책에 표시된 독서 난이도
읽기 쉬움: *
약간 쉬움: **
보통: ***
약간 어려움: ****
읽기 어려움: *****
1. 설국열차 - 자크 로브, 뱅자맹 르그랑 / 장 마르크 로셰트
"2005년 어느 날, 이 만화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순식간에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한 시기를 통째로 집어삼키리라는 것을.
나의 위험천만한 영화적 모험은 그때 이미 시작되었다." ― 봉준호
영화 '설국열차'의 원작 만화. 얼어붙은 세계, 멈추지 않고 달려야 하는 열차 안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철저한 계급 사회를 '기생충'이 수직의 이미지로 보여주었다면, '설국열차'는 수평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은 맨 앞의 황금칸, 힘없는 자들은 맨 끝 꼬리칸에서 살아간다.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계급 사회의 생리와 거짓을 설파하는 종교의 결탁, 진실을 은폐하고 긴장을 고조시켜 이득을 얻으려는 지배 집단의 모습은 어떤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서도 성립된다는 것이 읽는 이들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다.
독서 난이도: ***
2. 프롬헬 - 알란 무어
실제 19세기 영국 살인마 칼잡이 잭을 소재로 한 그래픽노블(컬러 만화책을 의미). 작가는 악랄한 연쇄살인범과 가엾은 피해자라는 구도의 '평면적'인 범죄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영국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비틀린 사회 구조와 하층계급의 열악한 처지가 '연쇄살인마'를 탄생시켰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런 부분은 봉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구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취조실에서 폭력을 일삼는 형사들이나, 시위진압에 차출되느라 범인 검거에 실패하는 장면들이 그 예이다.
3. 나쁜 친구 - 앙꼬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인생을 더 넓은 시간의 관점으로 체험해 볼 수 있게 한다. - 봉준호
예사롭지 않았던 학창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의 '열여섯' 시절 이야기. 비행청소년이라 불리며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으로 인한 일탈을 경험한 주인공 진주와 정애를 통해 청소년문제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학교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인 세상을 알아가기 위해 그에 따른 댓가를 치러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4. 블랙홀 - 찰스 번즈
그래픽노블계의 전설적인 작품. 미국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아이스너 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 성인의 문턱을 향해 걸어가는 고등학교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는 미래의 꿈이나 목표, 용기 같은 흔한 교훈적 이야기가 없다. 청소년 내면에 존재하는 음울한 고민과 비뚤어진 망상, 잔혹한 가학성, 도덕적, 성적 타락에 대한 유혹과 그에 상반되는 죄책감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특히 사춘기와 2차 성징에 따르는 성적인 각성, 성인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벌레병’으로 은유하는 등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5. 몬스터 - 우라사와 나오키
일본만화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을 받은 작품. 천재 일본인 뇌신경외과의 텐마 켄조는 머리에 총을 맞은 리베르트 부부의 아들 요한을 자신의 손으로 살리게 된다. 지역 권력자의 수술을 먼저 하라는 원장의 지시를 무시하면서까지... 그런데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살려낸 요한은 손톱만큼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몬스터'였다. 그때부터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기 위해, 텐마는 긴 여행을 떠난다. 봉준호 감독의 책장에 자리하여 틈틈이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작품이기도 하고, 나에게도 '만화가 이렇게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나'라는 걸 알려준 걸작이다.
독서 난이도: **
6. 20세기 소년 - 우라사와 나오키
10권 안에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이 2개나 들어있는 것만 봐도 그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애정이 느껴진다. '몬스터'와 동시 연재를 시작한 작품으로 지구를 구해내기 위한 소년들의 모험기를 그렸다. 그렇다고 소년명랑만화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아포칼립틱한 세계관 속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나간다. 악행의 주인공은 익명의 '토모다치(친구를 뜻하는 일본어)'. '토모다치가 누굴까'를 추리하는 것은 '20세기 소년'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독서 난이도: **
7. 붉은 방 - 임철우
군사독재 시절, 형사가 취조하던 방식의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 봉준호
1980년대 폭력적 사회상을 그려낸 임철우의 단편소설. 오기섭은 시국사범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낯선 사내들에게 끌려간다. 온통 붉은색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그는 발가벗겨진 채로 구타와 물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주도하는 경찰의 이름은 최달식. 둘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다. 오기섭에겐 월북한 큰아버지가 있었고, 최달식의 가족은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들에게 일가가 몰살당했다. '빨갱이'들을 잡아들이는 최달식은 스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파수꾼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 깊은 고통의 뿌리이자 현재진행형인 '좌익과 우익의 열병'을 다룬 작품이다.
8. 신판 보물섬 - 길창덕
길 선생님의 작품 중에 '신판 보물섬'을 가장 좋아한다. - 봉준호
명랑만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길창덕의 최고 걸작. 고철이가 보물지도를 찾고 드럼통 비행기를 만들어, 조수 삼삼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보물찾기'라는 소재를 가지고 명랑만화란 큰 틀 안에서, 모험만화, SF로의 변화도 시도한다. 인물의 움직임을 약화된 동선으로 묘사하는 등, 초기 명랑만화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9. 대단한 돼지 에스더 - 스티브 젠킨스
'옥자'가 나오기 전에 이 책이 나왔다면 배우와 스태프의 필독서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 봉준호
두 남자와 거대 돼지의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따뜻한 러브 스토리. 애완동물인 줄 알고 받은 미니돼지가 알고 보니 사육용 돼지였다! 운동화만 했던 아기 돼지는 3년도 채 되지 않아서 300킬로그램이 나가는 엄청나게 큰 돼지로 자란다. 하지만 이미 사랑하게 되었고 가족이 되는데 생김새와 크기는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 책을 펼치는 순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아닌 '돼지와 사랑에 빠진 날'이 될 것이다.
“어떤 생명은 덜 중요하다는 생각, 이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 폴 파머(하버드 의과대 교수)
10. 써니 - 마츠모토 타이요
일본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를 좋아하는데, 최근에 꽂힌 건 '써니'입니다. - 봉준호
쇼가쿠칸 만화상 수상작. 독창적인 작풍으로 일본 만화계에서 '천재'라고 불린 마츠모토 타이요 자신의 소년기를 그림 작품이다. 고아원 '별아이 학원' 아이들이 오롯이 혼자 있고 싶을 때 찾는 곳이 고물 차 '써니'이다. 혼자 슬픔을 달래고, 외로움을 삭여야 하는 아이들에게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장소이다. 작가는 어른들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고, 시설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동정을 느끼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부모와 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차곡차곡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작품을 읽는 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놓아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