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커버사진 출처: 서울신문
박찬욱 감독은 '깐느 박'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올드보이'가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박쥐'가 2009년 심사위원상, 가장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이 2022년 칸에서 감독상을 받는 등 유독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올드보이'로 전 세계에 한국영화를 알린 박찬욱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틈틈이 독서에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영화작업을 하지 않는 쉬는 기간이면 삼청동 북카페 구석에서 온종일 책만 읽는다고 한다.
독서는 내 영화의 자양분이며, 문학은 영화를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 박찬욱
소설을 즐겨 읽고, 책에 관한 인터뷰나 활동을 통해 책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의 인생책 10권을 살펴보자.
1. 레볼루셔너리 로드 - 리처드 예이츠
2. 히페리온 - 댄 시먼스
3. 흰 개 - 로맹 가리
4.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5. 탁류 - 채만식
6. 샌드맨 - 닐 게이먼
7. 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8. 타임 퀘이크 - 커트 보니것
9. 교수들 - 데이비드 로지
10.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 존 치버
* 읽은 책, 읽지 못한 책
*책에 표시된 독서 난이도
읽기 쉬움: *
약간 쉬움: **
보통: ***
약간 어려움: ****
읽기 어려움: *****
1. 레볼루셔너리 로드 - 리처드 예이츠
이것이 궁극의 부부싸움이다. - 박찬욱
'타임' 선정 100대 영문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인물들의 생생한 대화로 이어져 있다.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는 실제 부부나 그 밖의 현실적인 인간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처럼 사실적이다. 게다가 섬세한 심리묘사는 한 편의 웰메이드 영화와도 같다. 박찬욱 감독이 좋아하는 생생한 이야기, 캐릭터, 대사 모두를 충족시켜 주는 책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감독은 샘 맨데스가 맡았는데 케이트 윈슬렛의 남편이기도 하다.
2. 히페리온 - 댄 시먼스
댄 시먼스는 우리 시대의 호메로스다. - 박찬욱
SF 문학상인 휴고상을 수상한 댄 시먼스의 걸작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전쟁의 전야에 가톨릭의 사제, 대령, 시인, 학자, 탐정 등 각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순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돌아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고통의 신' 슈라이크와 행성 히페리온, 그리고 헤게모니 연방과 그들의 적 아우스터에 얽혀 있는 거대한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진다. 작가는 다양한 세계관과 종교관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자세하게 풀어놓는다. 후속작 <히페리온의 몰락>과 함께 '히페리온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3. 흰 개 - 로맹 가리
고결한 보수주의자의 염세적 근심. - 박찬욱
1960년대 격동기의 미국, 프랑스 사람 로맹 가리의 미국 체험기. 산책을 나가 며칠이나 소식이 없던 누렁개 샌디가 친구를 데려왔다. 잘생기고 붙임성 좋은 독일셰퍼드였다. 이 개는 독특한 면이 있었는데, 바로 특정한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살점을 뜯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부색이 검었다. 이 책은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성과 여성,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 각종 대립 구도로 사회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격변기 미국에 관한 생생한 현장 보고다.
4.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하드보일드 문학의 폭은 원래 이렇게 넓었다. - 박찬욱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학파의 학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실 해밋의 단편 9편이 수록된 책. 하드보일드란 말이 범죄소설 장르의 일종으로 뜻을 바꿔 쓰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폭력에 의해 촉발된 감정- 불안, 두려움, 고뇌 -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정한 태도’를 의미한다. 대실 해밋이 창조한 캐릭터 샘 스페이드와 무명의 사립탐정 컨티넨털 옵은 폭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폭력적인 사건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사건의 해결에만 몰두한다. 박찬욱 감독 영화의 '하드보일드함'은 대실 해밋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 탁류 - 채만식
한국인, 한국어. - 박찬욱
박찬욱 감독이 인생책으로 꼽은 유일한 한국 소설.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와 소설 '탁류'에는 공통점이 있다. 오래된 옛 시절을 배경으로 삼지만 여전히 오늘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아가씨'는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을 가지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탁류'는 복잡하게 파생된 자본증식 시스템 앞에서 돈을 향한 마음만 자꾸 앞세우다가 주머니를 몽땅 털리는 하층 서민의 애환을 다룬다. 껍데기만 달라진 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들이다.
“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 '탁류'의 여주인공 초봉의 절규
6. 샌드맨 - 닐 게이먼
닐 게이먼은 우리 시대의 단테다. - 박찬욱
1990년대에 가장 많은 환호와 상을 받은 만화 시리즈. 스토리 작가 닐 게이먼의 환상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당대 만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들이 돌아가면서 그림을 그렸다.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보여준 것처럼 잘 만들어진 환상은 그 한계를 넘어선 실재성을 갖는다. 현대 신화와 다크 판타지를 혼합하는 동시에 같은 시대의 소설과 역사 드라마와 전설을 촘촘하게 엮여낸 '샌드맨'도 그러한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만화책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7. 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추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남자 이야기였는데, 웃다 웃다 슬퍼졌다.
이런 놈을 불쌍히 여기도록 만들다니 나보코프도 참 엔간하다. - 박찬욱
언어의 마술사 나보코프가 탄생시킨 20세기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스캔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문제작이다. 열두 살 소녀를 향한 중년 남자의 사랑과 욕망을 담고 있는 '롤리타'는 처음에는 선정적인 내용으로 유명해졌지만 이후 작가가 겹겹이 숨겨놓은 수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문학적으로 재평가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위 박찬욱의 코멘트는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에게 하는 말인지,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에게 하는 말인지 헷갈린 정도로 두 남주사이에 유사점이 많다.
8. 타임 퀘이크 - 커트 보니것
커트 보니것 선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돌아가신 다음에 한 번 더 읽었더니 웃는 틈틈이 눈물이 찔끔찔끔. 플롯은 거의 없고 일화나 잠언 따위들이 막 나열된다. - 박찬욱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수축한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소설. 탄생 이래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팽창을 이어온 우주가 별안간 회의에 빠지며 잠시 수축한다. 그 사이 지구의 시간은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이내 우주는 다시 팽창을 이어가기로 결심하지만 그 결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지난 십 년간의 일들을 좋건 나쁘건 정확히 한번 더 반복해야 한다. 똑같은 사람과 한번 더 결혼하고, 엉뚱한 패에 또다시 돈을 걸고, 이미 퇴고한 작품을 다시 한번 쓰고. 무슨 일이건 다시 한번 더! 사람들은 기이한 데자뷰를 느끼면서 매분, 매시간, 매년 힘들게 나아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십 년의 재연 기간이 끝난 뒤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의 일을 맹목적으로 행하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의지에 당황하고 만다.
9. 교수들 - 데이비드 로지
배운 사람들 이야기인데, 한심한 짓들만 골라 하지만 홍상수 영화 같지는 않다.
제법 로맨틱하고 낙관적 분위기 넘친다. - 박찬욱
전 세계를 캠퍼스 삼아 제트기를 타고 여행하는 학자들의 세계일주기. '문예비평위원직’을 두고 서로 경쟁하거나 이러저러한 문예이론을 품고 학술회의로 몰려다니는 교수들을 '성배'라는 헛된 야심과 욕망을 좇는 '원탁의 기사들'에 비유한다. 학자 사회의 별의별 모습이 다 풍자적으로 그려진다.
10.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 존 치버
그의 소설은, 사람이란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다는 진실을 실감시킨다. 다른 작가라면 장편 하나 나올만한 이야기로 단편을 만드니, 단편집 한 권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 박찬욱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작가다. 이 책으로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 전미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존 치버의 작품들은 매우 보편적이면서 한편으론 매우 매혹적이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 연인들 사이에서 헛된 기대와 무모한 욕망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짚음으로써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다. 그렇지만 순탄한 삶의 운명적인 전환, 기상천외한 반전과 놀라운 결말 등 뛰어난 단편소설의 특징과 진수 역시 다 들어 있다. 그런 단편이 61편이라니... 천근만근이란 게 괜한 너스레가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을 봤고 그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지만 그가 꼽은 인생책 중에는 읽어본 책이 없다.
'탁류'만 국어 교과서에서 부분적으로 본 기억이...
재밌어 보이는 책이 많은 만큼 겨울 휴가 기간을 이용해 몇 권 읽어봐야겠다.
소설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아마 위 리스트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