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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끄적쟁이 Apr 06. 2024

법보다 주먹, 대해적의 시대

내 보물 말인가? 원한다면 주지. 찾아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기에 두고 왔다! - 골 D. 로저



대항해시대? 아니, 대해적시대!


서로 떨어져서 살아가던 각 대륙이 15세기부터 바닷길을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각 지역의 개별 역사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나의 흐름 속에 녹아들어 갔다. 다른 문명국가들과 교역에 나선 유럽인들이 가장 먼저 수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 지금 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지만 이 시대에는 교역과 약탈의 구분이 없었다. 자체 무장을 갖춘 상선들은 힘의 균형이 비슷한 항구도시나 배를 만나면 서로 필요물자를 교환하는 상업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무장이 약해 보이는 다른 선박을 만나면 무자비한 해적 행위를 통해 수익을 올렸다. 대포알과 물자를 교환(?)한 셈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해적들의 출발이 국가로부터 적국 선박을 강탈할 권리를 위임받아 공격 행위를 하는 민간 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가들은 '영토'는 통제하지만 아직 '영해'를 제어할 정도의 역량은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던 것이 사적 폭력집단인 '해적'이었다. 국가는 해적을 통해 적국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해적들은 나중에는 국가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무법자가 되고 만다. 이때부터 해적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수단인 '해군'의 소탕 대상이었다.

실패하면 '해적', 성공하면 '해군' 아닙니까?!!!!  출처: 원피스


해적의 뿌리

8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가 점차 기독교권 기사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되찾았다(이를 '영토 재정복 운동', 그들 말로는 레콩키스타라고 부른다). - 책 '문명과 바다' 중에서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는 '칼잡이' 천지였다. 하지만 전시의 위대한 전사들은 평화시에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이런 위험한 '칼잡이'들은 해외로 내보내는 게 상책이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해외 전도 사업'이다. 해외 진출은 모험 성격이 큰 사업이다. 국내에 탄탄한 사업 기반을 갖추고 있는 상인에겐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해외 탐험을 나설 이유가 없었다. 반면 신앙을 퍼트리기 위해선 죽음도 불사하는 '종교전사'에겐 충분히 동기부여가 되는 사업이었다. 성공하면 대박(금, 은, 후추, 도자기, 면직물 등을 획득해 부자 되기), 실패해도 순교자로 남을 수 있으니. 이렇듯 대항해시대는 중세 기사도적인 꿈과 자본주의적인 열망의 조합에 의해 개화한 것이다.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


이 시기에는 중국과 인도가 가장 잘 사는 선진국이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중국이 미국 역할, 인도가 유럽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유럽은 변방 지역이었다. 세계는 유럽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찾아 해외로 나간 것이다. 


비단, 도자기, 차, 후추, 면직물 등 당시의 사치품들은 대부분 'made in Asia'였다. 자연스레 교역은 인도양, 특히 말라카해협에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국제 교역의 허브'가 된 것이다. 이후 인도양은 유럽 각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시작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였고,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뒤를 따랐다. 결국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을 장악하고 인도를 식민지화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한 것이 근대 세계사의 하이라이트다.

말라카해협의 중요성은 현대에도 전혀 축소되지 않았다.  출처: 매일경제


사치품의 결제수단


아시아에서 사 와야 하는 물건은 많은 반면, 팔 물건이 많지 않았던 유럽의 히든카드는 귀금속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특히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은 스페인의 아시아 사치품 수요를 해결할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아메리카의 귀금속 생산-유럽으로의 유입-아시아로의 유출', 이것이 한동안 아시아를 상대로 한 교역의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광산이란 언젠가 한계를 드러내는 법. 영원할 것 같았던 포토시 은광도 결국 바닥나고 말았다. 유럽에게는 또 다른 결제도구가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아편이었다. 원래 아편은 고가의 진통제로서 부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약품이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벵골 산 아편을 대량으로 중국에 수출하면서 일반인에게 아편을 확산시켰다. 모두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중국의 사치품, 차 때문이었다. 이렇듯 영국과 중국 간의 아편전쟁은 유럽의 지불수단 부족 문제로 인해 파생된 사건이다. 상대 국민들의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는 해적 같은 행위는 대항해시대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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