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사진 출처: 딴지일보
최초의 해양 문화권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같은 반도국가에 뿌리를 내렸다. 적이 오직 한 방향으로부터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져, 바다에 집중하기가 수월해서이다. 그러나 같은 논리라면 섬나라들은 한층 더 방어하기가 쉽다. 다만 대항해 시대 이전, 인류가 육로에 의존하던 시기에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느려 섬나라의 발전 속도가 더뎠던 것뿐이다. 그런데 바닷길 이용이 활발해지면서 섬의 장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섬이지만 대륙과 가까워 안보와 교류 양쪽에서 장점을 취할 수 있게 된 나라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를 추월했다.
인류가 깊은 바다를 항해하기 전에 원거리 무역은 중계무역이었다. 중계무역은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가서 물건을 상인한테 넘기면 그 상인이 또 얼마 안 가서 다른 상인에게 넘기는 방식이었다. 귀한 물건을 싣고 아주 멀리까지 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건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까지 가려면 엄청나게 비싸져야 한다는 뜻이다. - '비트코인, 그리고 달러의 지정학'
섬나라가 중계무역을 통해 해외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사치품일 수밖에 없다. 무지막지한 유통마진이 붙기 때문이다. 영국 입장에서 아시아, 아메리카의 귀한 물건을 저렴하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다를 장악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야 멀리까지 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극동아시아를 이어주는 해상로는 해적이 들끓고 지역 강자들 간에 오래된 적의가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이런 바다를 오고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석탄을 (그리고 훗날 석유를) 태워 증기를 만드는 역량을 갖추게 된 영국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바다에서 군함과 맥심 기관총으로 자신의 힘을 뽐낼 수 있었다. 그들은 원산지에서 직접 상품을 가져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항해 경로를 따라 위치한 항구를 접수해 자국의 화물선과 군함들이 정박하고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여러 대양을 하나의 바다로 묶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다는 것이 광활한 내륙 지역까지 장악할 힘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작 수천 명 정도의 인력으로 그 넓은 영토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상은 몇몇 중요 거점 지역들을 장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른바 '상업거점제국' 전략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이전의 지배세력이었던 포르투갈, 네덜란드도 이 방식을 구사했다. 이들은 대륙 세력처럼 영토를 확장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하는데 역량을 쏟지 않았다. 대신 급소를 확보해 항행의 자유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 호르무즈 해협, 말라카 해협 같은 유라시아 대표 급소말이다. 이런 핵심 해양 입지와 주요 항구를 틀어쥔 영국은 몇 개의 점들로 시작해서 쐐기처럼 내륙으로 파고들어 가 결국 대륙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영국은 해양강국으로서 유럽대륙 입장에서 보면 제3자이다. 대륙에 대한 영국의 전략은 유럽이 하나로 통일되어 영국을 봉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은 세력판도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대륙의 어떤 강국과도 영구적인 동맹을 맺지 않는 전략을 썼는데, 이를 두고 '위대한 고립'이라고 한다. 영국은 바다라는 방벽이 있어 육지의 세력 다툼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고립주의 전략이 주효했다.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국가를 지원하여 양국의 소모전을 유도하는 안전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역외균형자' 전략 때문에 대륙국가들은 섣불리 이웃국가 침략을 통해 세력확장을 도모할 수 없었다.
바다는 속성상 하나로 연결된 평평한 대륙과도 같아서 한 명의 주인이 모두 가져야만 평화로운 곳이다. 주인 없던 바다가 하나의 세력에 속했을 때 육지를 연결하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산성 높고 평화로운 공유지가 된다. 이는 제국이 해적들보다 착해서가 아니다. 제국은 그 특성상 여러 민족, 지역을 묶어서 유지해 나가야 하므로 세력들 간에 힘의 균형이 중요하다. 따라서 나름의 공정한 심판자를 자처하기 마련이고 일관성 있는 규칙을 내세워 지역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통합하려고 한다. 따라서 강력한 제국에 의해 세계질서가 확고히 세워졌을 때가 역사적으로 가장 평화로운 시기이기도 했다. 다만 그 시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짧을 뿐. 영국 역시 독일의 통일과 확장으로 고립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제국은 2인자의 팽창을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체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