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빛의 여정 11화

11화 / 1장 불씨 운반자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11화 / 1장 불씨 운반자


11화갈피.png


기나긴 밤이 흘러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수여식의 아침으로 밝아왔다. 폭풍전야처럼 다들 손님 맞이에 긴장한 채로 제자리에 있었다. 정오 전에는 대부분의 불씨 운반자 일행이 도착하는 편이었다. 크리네스 마을 장로이자 크리넬의 족장 크리네스 4세가 아침에 목욕 재개를 마친 후 흰 로브를 위에 걸치며 조금은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아르한도 흰 로브를 입은 채 그러나 안에는 가죽 갑옷을 입은 채로 아버지 곁에 머물며 일행들이 오는 지 지켜보고 있었다. 크리네스 4세에게서 이제는 과거 용맹한 전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예전처럼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대가 바뀌었다.


대신에 부족을 통합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 어울릴만 한 화술을 익혀나갔다. 그리고 무술의 빈자리를 화술로 채웠다. 변화를 온 몸으로 그대로 맞아가면서도 크리네스는 언제나 적응의 대가였다.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오노라면 그는 꺾이지 않았고 과거의 전사 시절의 성격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필요하다면 과감없이 보여주었다. 영원한 추위와 이그네움 수여와 공물 준비도 그에게 있어선 크리네스 4세라는 노익장의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자신과 상대측 인물 한 두명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아버지와 불씨 운반자의 대화가 이어지는 응접실에서 아르한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찌 저리 평소에는 고집센 인간이 저렇게나 능구렁이가 되는 지, 또 사람마다 달리 성격도 귀신같이 달라져 말이 별로 없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모습을 볼 때면 여러 번을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해하지 못할 예정이었다. 그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오늘도 말이다. 크리네스 4세가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으면서 등 뒤에서 서성거리는 아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듯이 말했다.


"너 저번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저 쪽에서 어떤 말을 하든 간에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어"

"아니 아버지 한 두번 하는 것도..."

크리네스가 말을 끊으며 이어 말했다.

"이번에 오는 작자가 신참인지 뭔지 모르지만 일단 낯짝을 보고서야 아비가 분위기 잡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르한은 깨갱했다. 대들어봤자 언성만 높아지고 자칫하다간 오랜 전사의 힘 자랑이 자신에게 발휘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머쓱한 지 코를 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대게 소식의 출처가 어딘지에 따라 사실여부와 해석의 방향은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수여식을 처음 해보는 불씨 운반자라? 그런 풋내기들은 본국에서 아주 가까운 곳만을 보내면서 훈련시키는 데 말이지?" 크리네스 4세가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그때 마침 망루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팔 소리였다. 드디어 불씨 운반자가 도착한 모양이다. 크리네스 4세가 눈을 서서히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한도 같이 일어나며 족장의 거처 앞까지 오게 될 손님을 맞이하러 밖을 향해 발을 뗐다.


크리네스가 정문을 향해 걸어가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돌아보면서 검지를 들어 보인 채 말했다.

"끝날 때까지 정신 차리고 처신해라"

아르한은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 옆을 따라 걸었다.

크리네스 마을의 목조 성벽에서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성문은 힘겨운 모양인지 씨름이라도 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망루에서는 저 만치 열리기를 기다리는 불씨 운반자의 일행이 보였다. 마차 안에는 이그네움으로 추정되는 나무상자들이 쌓여있었다. 말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발을 튀겼다.


성문이 모두 열리자 가장 먼저 앞에 선 말을 탄 네이즈가 보였다. 그리고 뒤를 잇는 호위병들과 함께 마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문에서 광장까지 직선으로 나있는 도로 양쪽에서 부족민들이 환호가 시작되었다. 박수를 치는 부족민들, 방방 뛰며 기뻐하는 부족민들, 자신의 옷을 허공을 향해 휘날리는 부족민들 등 많은 사람들이 도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불씨 운반자의 일행과 같이 서서히 발을 맞추며 걸었다. 크리네스의 경비병들은 도로 밖으로 나오려는 인파를 통제하며 사람들이 네이즈 일행과 마차에 가까이 가는 것을 방지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인파의 환호소리는 점차 광장을 향해 나아가며 울려퍼지고 있었다. 인파들 중 감동을 먹은 모양인지 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토록 이그네움이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불씨 운반자가 그리웠던 걸까?


개선장군마냥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네이즈는 인파의 환호를 즐기며 나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호위대장은 한 두번 겪는 일이 아닌 지라 무뚝뚝한 표정이였으나 조금은 피곤한 모양새였다. 그의 호위병들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마차의 천은 금새 교체를 했지만 갑옷은 그렇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모습이 조금 모냥 빠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재빠르게 인파 중 누군가는 아예 대놓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옆 사람에게 그들의 갑옷 상태를 지적하고 있었고, 휘둥그레 눈을 뜨며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호위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고 네이즈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마침내 광장에 도달한 네이즈 일행은 지나가면서 자신들에게 건네 줄 공물들을 구경했다. 또한 몇몇 병사들은 계속 눈길을 떼지 못하는 만찬장의 요리들은 그간 고생하며 먹었던 것보다 질과 양에서 압도적이었다. 호위대장도 이때 만큼은 동공이 흔들리며 음식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멀리 흰 옷을 입은 두 사람과 양 옆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점차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광장을 돌아 족장의 거처를 향해가며 높이 꽂힌 깃발들이 하늘을 덮으며 나부끼고 있었다. 회색 하늘과 흰색 천이 대비되어 눈에 잘 들어왔고 중앙에는 선명하게 크리네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채로 흔들렸다.


이제 곧 불의 수여식이 시작 될 예정이었으므로 동네방네 모든 부족민들이 도로로 나와서 광장으로 향해 걷거나 뛰기 시작했다. 경비병들도 쉴새없이 뛰어가며 광장의 중앙 그리고 공물등을 동서남북 4개의 깃발을 기점으로 크게 에워싸며 군중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통제했다. 그중 일부는 족장의 거처에 도착한 일행들과 마차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그네움 전달식과 본국에서 오신 높으신 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앞 줄에 앉기 위해 사람들이 금새 몰려들었다. 추위를 매일처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불의 수여식은 그들의 마음을 해소하는 또 다른 축제였다. 사람들 사이에 로이딘과 시테온도 자리에 앉기 위해 도착 할 무렵에 이미 루네는 가장 앞 줄에 앉아 있었다. 반면 그들은 벌써 앞 줄이 다 차버리자 루네 오른 편, 세 줄 뒤로해서 자리잡고 앉았다. 침튀기는 열정적인 연설도 있을 예정이라 그 분위기를 흠뻑 만끽할 사람들은 앞 줄에 앉아야 유리 했다.


사방의 환호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 경비병들이 고함치는 소리 등등 크리네스 마을 중앙부는 요란법석했다.

한편 경비병이 족장의 거처의 정문을 닫자 그 모든 소리가 마치 일거에 잦아드는 듯 했다. 크리네스 4세와 아르한, 네이즈와 호위대장이 드디어 실내로 들어왔다. 찰나의 고요속에서 각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 꺼내 볼 시간이 오게 된 것이다.




12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토요일 연재. 소설의 진도와 열정(?)때문에 추가 연재를 할 수 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