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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Jan 10. 2024

지푸라기 잡는 심정

타협한 자와 타협하지 않은 자



    현재의 연호


  또 살았다. 눈이 떠진 건 새벽 3시 23분. 덜컹거리는 차체 안에서 눈이 떠진 나는 어딘가에 견인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아마 병원이겠지. 실패 원인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짝 열린 창문, 그 사이로 메탄 연가가 새어나간 듯했다.

  “씨발……”

  결국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인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견인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차가 덜컹거렸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걸로 나의 자살 실패는 두 번째였다.



  5년 전의 연호

 

  딸이 내민 건 학교에서 그린 내 모습이었다. 덥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 러닝셔츠와 트렁크 팬티를 입은 채 야구를 보는 내 모습. 그 장면은 딸이 본 나의 모습이었다. 우측 모서리엔 아마 아빠의 직업을 적는 공간인 듯했다. 혜민이의 그림 위엔 그저 ‘아빠’라고만 적혀 있었다.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딸이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일이었다. 점점 그녀가 내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 건 중학교에 올라가고나서부터였다.

  “아빠, 제발 나가서 뭐라도 하면 안 돼? 창피해 죽겠어.”

  사춘기가 온 소녀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따가웠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 애써 넘기려던 멋쩍은 웃음도 지어 보일 수 없었다. 혜민이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내는 아빠에게 큰 소리를 내지 말라며 그녀를 혼냈다. 그러나 아내도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건 매한가지였다.

  “여보, 혜민이를 봐서라도 제발 뭐라도 해. 애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

  “나도 뭐라도 하고 싶어…… 그런데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무얼 해. 받아주는 곳도 없을 텐데.”

  아내가 지겹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보는 그게 문제야. 그저 패배자 같은 그 마인드. 이럴 줄 알았으면…… 아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지 곧장 자리를 떠났다.


  결국 빚을 내 작은 치킨집 하나를 차렸다.

  “여보, 혜민아. 이번엔 진짜 잘해볼게. 부끄러운 남편이, 창피한 아빠가 되지 않을게.”

  개업을 한 첫날, 나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옆엔 아내도, 혜민이도, 개업을 축하해 주는 이 아무도 없었지만 나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했다.

  처음엔 인건비를 감당할 수도 없어 직접 치킨을 튀기고, 배달을 나섰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도 가게를 내버려두고 배달을 나섰다. 그러다 보니 홀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게가 빈 줄 알고 도로 나가는 경우가 빈번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한 명 고용해야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몇 번이고 갈려 나갔다. 알바 첫날부터 지각을 하고, 하루종일 핸드폰만 보던 애, 시급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올려달라고 한 애, 일이 힘들다고 이틀 만에 도망을 친 애. 그렇게 몇 번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마음 같아선 혜민이에게 용돈벌이 식으로 홀에 세우고 싶었으나, 아직 그녀는 나와 무언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싫다며 매정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지쳐갈 때 즈음 한 남자아이가 찾아왔다.

  “저…… 여기 아르바이트 면접 보려고요……”

  

  남자아이의 이름은 기호.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점, 말 수가 굉장히 적다는 점만 빼고는 거슬릴 부분이 없었다. 일도 알아서 착착 잘했다. 내가 배달을 가느라 가게를 비울 때면 알아서 치킨을 튀겨 손님들께 내왔고, 발주도 할 줄 알아 전날 부족한 식자재나 물건들을 주문하고, 채웠다. 분명 프랜차이즈나 매출이 좋은 가게에 가면 최저시급보다 높은 시급을 받으며 일했을 인재였다. 그런 인재가 최저시급도 주기 어려운 이런 치킨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미안했다.

  기호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는 달리 꿋꿋하게 일을 다녔다. 시급을 올려다는 말도,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손님이 없다고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포장 박스를 접었고, 양념 소스와 소금을 채웠고, 닭을 튀겼다.

  “기호야, 너는 왜 이런 곳에서 일을 하냐? ”

  단지 차오른 호기심에 그에게 물었다.

  “그럼 사장님은 항상 적자인데 왜 이 가게를 계속하세요? ”

  “이 자식이, 우리 이제 6개월 봤는데 벌써 막말하기냐? ”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전 벌써 사장님이 친근하고, 익숙해졌거든요.”

  “너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선택적 함구증 뭐 그런 거냐? “

  “그런 건 아니고요. 뭐 아무튼 저도 궁금해요. 사장님이 왜 이 가게를 계속하는지.”

  “인석아, 아직 개업한 지 일 년도 안 됐다. 언제 크게 터질지 모르는 거잖니.”

  “저도 마찬가지예요. 가게 대박 나면 시급 왕창 올려달라고 하게요. “

  기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너한테 못 해줄 게 어딨냐. 시급 만 원이고, 이 만 원이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주마. “

  오랜만에 크게 웃은 것 같았다. 늘 과묵하던 기호도 미소를 살짝 머금고 있었다. 그래,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실컷 웃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더 크게 웃었다. 꿈과 웃음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원래라면 아내가 티브이를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집 안은 소름 끼치는 정적만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혜민이 방 안도 고요했다. 학원이나 독서실에 갈 시간도 아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음은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될 뿐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도어록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뒤에서 보이는 아내와 혜민이의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들어온 거야. 혜민이까지 데리고.”

  “잠시 어디 좀 다녀왔어. ”

  “전화는 왜 안 받았는데.”

  아내가 스마트폰을 꺼내 부재중 전화를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니, 운전하느라 못 받았던 거지. 여보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해? “

  신경이 날카롭게 솟은 아내의 목소리에 괜히 주눅 들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미안. 좀 예민했나 보네. “

  “어서 화장실 들어가서 샤워나 좀 해. 기름 냄새가 잔뜩 나. “

  혜민이는 아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제 경멸의 눈빛도, 동정의 눈빛도 아니었다. 그저 차마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만이 그 눈동자 안에 담겨 있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머리카락에 벤 기름 냄새를 맡았다. 뜨거운 물을 가만히 맞으며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뜨거운 물과 함께 녹아 흘러 내려가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는 건 하루에 간신히 닭을 10마리 튀기는 적자 가게도, 묘한 혜민이의 눈빛도, 기호와 떠올린 희망고문도 아니었다. 그저 아내가 바뀌었다는 것, 라현이 바뀌었다는 것. 그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라현


   라현과 나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그녀에게 나는 남자 동기들과는 다른 듬직함이 보였다고 했다. 일단 군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한몫했다. 라현의 학번 남자들은 이제 곧 군대를 가야 한다며 찡찡거리고, 술을 마시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런 남자들 사이에서 과묵하고, 나이도 많고, 군대 또한 다녀왔다는 사실은 라현의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그녀와 같이 조별과제를 했었다. 그녀는 남들에게 똑 부러지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으나, 사실 동갑내기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무언가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고, 발표 자료도 어딘가 엉성해 하나하나 전부 내가 수정했다. 나는 라현을 포함한 모든 조원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라현은 점점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료를 만들 때도, 대본을 작성할 때도 전부 그녀는 내 옆을 지켰다. 그리고 한 번도 빠짐없이 내게 뚱뚱한 바나나우유를 건넸다.

  “선배는 정말 똑 부러지신 것 같아요. 배우고 싶어요. 제 동기들한테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 선배랑 함께 배우고 싶어요. “

  나는 그녀가 건넨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라현의 눈동자는 마치 모래사장 같았다. 반짝반짝 빛이 났고,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런 그녀의 호의가 그저 동경인지, 호감인지 구분 지을 순 없었으나,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본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라현이 보던 겉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언제나 불안이 가슴 한편에 존재했다. 온갖 스펙을 쌓아도 부족하게만 느껴졌고, 1등이 아니란 성적에도 늘 불안을 야기했다. 슬슬 취업 걱정이 앞서게 되는 대학교 4학년. 우리 집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집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에 붉은 스티커를 붙였고, 큰 박스를 가져와 스티커가 붙은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날, 나는 집을 잃었다. 나는 부모님을 잃었다. 나는…… 세상을 잃었다.

  압류를 당한 지 사흘이 지난날, 아버지가 산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받았다. 집과 남편을 순식간에 잃은 나의 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고,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렇게 홀로 아버지의 빈소를 지켰고, 홀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그리고 나 홀로……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해야만 했다.

  졸업까지 딱 한 학기 남은 여름방학, 나는 학교에 자퇴원을 제출했다. 쌓여가는 빚은 내게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날 새벽, 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몸을 던진다는 한 한강대교 위에 올라섰다. 캄캄한 밤하늘 위에 그려진 희미한 달빛이 한강물에 반사되어 비추어졌다. 깊이도, 온도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처럼 목을 매달거나, 높은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시체를 처리하기도 힘들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아무도 내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집에 압류 딱지가 붙은 건 전부 아버지 탓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했으나 그 사실을 우리에게 비밀로 했다.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척하며 피시방이나 영화관에 가 시간을 때웠고, 저녁이 되어서야 지친 적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머지않아 어머니에게 장리해고 사실이 들통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퇴직금과 대출받은 돈으로 피자집을 차렸으나, 버는 돈을 족족 투자에 쓴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게 된 정보는 모두 사기꾼들의 추파였고, 그렇게 아버지는 전재산을 잃었고, 그에 비롯한 몇 배의 빚을 얻게 되었다.

  즉, 나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일이었다. 그가 빚을 지던, 남 보증을 서던, 살인을 저지러던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야 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그의 족쇄를 고스란히 내가 받는 건 죽도록 억울했고, 비참했다. 그 족쇄의 무게는 내 삶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것이 인도하는 건 결국 아버지와 똑같은 길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기에 현실과 타협하고 그 길을 걸을 뿐이었다.


  난간은 더럽게도 높았다. 매섭게 살갗을 찌르는 바람도 내가 어서 뛰어내리길 재촉했다. 다시 난간에 매달려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웠지만 일렁이는 물결이 나를 안아준다고 말하는 듯했다. 갑자기 흥분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 없을 거란 강한 예감이 솟았다. 내가 타협한 길. 내 발목에 감긴 족쇄가 인도하는 길. 그렇게 눈을 천천히 감고 나를 안아주려는 물결로 뛰어들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나를 막았다. 익숙한 목소리, 바나나 우유처럼 달콤한 향기가 나는 목소리. 라현이었다.

  “선배,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어요? ”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어요.”

  “나 선배가 한 학기 남기고 자퇴했다는 말을 들은 뒤, 한참 동안 선배를 찾으러 다녔어요.”

  “이 시간까지 밖에 있으면 집에서 걱정해요. 어서 돌아가요.”

  “이런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얌전히 돌아가겠어요. 어서 내려와요. “

  “미안해요. 정해진 길을 갈 뿐이에요. 라현이도 이해해 주길 바라요.”

  라현이 눈물을 보였다. 지긋지긋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토록 흘린 눈물. 그저 상대방의 동정을 사기 위한 최고의 수단. 그들이 내게 보인 눈물도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내게 건네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보이는 수단. 라현의 눈물도 그런 수단으로 보였다. 내가 이 난간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수단. 지긋지긋한 그 눈물. 나는 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현은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차분해진 가슴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라현이 후드 주머니에 손을 짚어넣었다. 그리곤 익숙했던 물건을 내게 건넸다.

  “나랑 바나나 우유 먹어요.”

  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가 건넨 바나나 우유를 받아 들었다. 늘 차가웠던 바나나 우유는 따듯했다. 그때, 라현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 선배 좋아해요. 그러니까, 나랑 바나나 우유 더 자주 먹으러 다녀요.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퇴원을 낸 뒤로, 그녀는 내게 이 바나나 우유를 건네주기 위해 얼마나 나를 찾으러 다녔을까. 따듯해진 바나나 우유에서 그녀의 땀방울이 느껴졌다. 조금은 더 살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 바나나 우유를 더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자살기도를 실패로 만든 건…… 라현이었다.



  작은 꿈틀거림


  근무날도 아닌데 기호가 가게에 찾아왔다. 리뷰에 댓글을 작성하다 말고 그를 맞이하러 홀로 나섰다.

  “오늘 일하는 날도 아닌데 어쩐 일이냐? ”

  “갑자기 치킨이 먹고 싶어 져서요.”

  “맨날 튀기는 치킨인데 질리지도 않니? ”

  “가끔 그런 날이 있잖아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위한 닭을 한 마리 튀겨주었다. 기호는 홀에 앉아 치킨을 기다리는 내내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념 소스나 소금은 알아서 가져다 먹어라. 어차피 어디 있는지 다 알잖아.”

  “네? 저는 오늘 아르바이트생이 아니고 손님으로 온 건데요? ”

  “아주 질 생각을 하질 않아요 아주.”

  기호가 닭다리살을 집어 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거리는 소리에 기호가 이렇게 잘 먹는 애였나 싶었다. 전형적인 이십 대 초반의 남자아이 같았다. 닭 뼈까지 씹어 먹을 듯한 턱관절의 움직임. 괜스레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사장님.”

  기호가 속삭이듯 말했다.

  “응, 왜? ”

  “전에 사장님이 저보고 왜 여기 계속 다니냐고 물어보신 거 기억나요? ”

  “그렇지, 기억나지. 그때 매출이 잔뜩 오르면 네 시급을 왕창 올려준다는 것도 기억나고.”

  “그러면서 저도 여쭈어보았잖아요. 사장님은 이 가게를 왜 계속하냐고요.”

  “그렇지. 내가 그때 무어라 대답했더라? ”

  “언젠가 매출이 오를지 누가 아냐고요.”

  괜스레 달아오르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그 이유인지 궁금해서요. ”

  “당연하지. ”

  기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닭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콜라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눈 깜짝할 새 닭 한 마리를 모두 깨끗하게 발라먹은 뒤였다.

  기호는 밥을 먹었던 테이블을 싹 정리하고, 뼈 통까지 비웠다. 설거지까지 하고 간다고 했지만 애써 말렸다. 잘 먹었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카드를 내밀었으나, 값은 받지 않았다. 그러지 말라며 버럭버럭 인상을 찌푸렸으나, 주문을 넣지도 않아 결제할 수 없다고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기꺼이 그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대낮인데 어디 갈려고? ”

  “콘서트요. 좀 오랫동안 기다린 콘서트라 놓쳐선 안 됐거든요. “

  “네가 그런 것도 좋아했다니. 의외구나. 그래, 재밌게 놀다 오렴. 그럼 내일 보자.”

  기호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그날 기호는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다. 오후 일곱 시가 되어서도 주문이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아 결국 일찍이 가게 문을 닫았다. 그 대신, 한동안 하지 못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이른 저녁의 바람은 어색하기만 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온 사방이 네온과 가로등으로 밝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이른 저녁의 거리는 새벽의 거리보다 밝았고, 젊었다.

  큰 길가에는 두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위를 잊은 채 둘의 노래를 듣는다고 서 있었다. 앞에 놓은 박스 안으로 돈을 집어넣기도 하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껴 그들의 노래를 들어보았다. 모자를 쓴 남자는 기타 줄을 몇 번 튕기더니 본격적으로 다음 노래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잔잔한 기타 소리가 이루는 하모니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리에 붙잡혀 모여들었다. 젊었다. 청춘이었다. 두 남자는 내가 한강 다리 위에 올라 타협한 길을 가려고 했을 적의 또래로 보였다. 그들은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저 감미로운 목소리는 절대 평범한 삶을 거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을.

  노래가 끝나고 센터에 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쉽지만 저희가 준비한 공연은 여기까지입니다. 날씨가 추움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 노래를 들으러 와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럼 저희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곡만 더 하고 물러날까요? ”

  관객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모여 뭉쳐진 네, 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래요. 그냥 이대로 가는 건 추운 날씨를 견딘 여러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아직 발매가 안 된 곡을 불러볼까 하는데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 선택을 전혀 못 하겠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딱 한 분, 오늘 있었던 사연을 들려주시면 사연에 맞춰 곡을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수는 주변을 빙, 둘러보고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멈추었다. 그 순간,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애써 눈을 피했지만 그는 놓치지 않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기 아버님, 잠시 올라와주시겠어요? ”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그의 손이 향한 나를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한 순간에 이목이 집중되니 몸이 뻣뻣하게 굳은 듯했다. 아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듯했다. 그러나 나를 응원하는 소리와, 남자가 괜찮다고 다독이니 나도 모르게 그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을 가다듬었다. 학창 시절에도 이런 경험이 없었는데…… 연신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가 건넨 마이크를 받아 올렸다.

  “중학생 딸을 둔 김연호라고 합니다. 지금은 작게 치킨집을 하고 있는데 오늘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이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

  “아버님은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노래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중학생 딸을 둔 김연호 아버님을 위해 노래 한 곡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사연 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자는 뒤에서 기타만 치던 남자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서로 한 번 끄덕였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둘은 기타 코드를 잡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당신을 등 돌리고, 모두가 그대를 무시해도

  언제나 난 당신 곁에

  모두가 그대를 적으로 돌려도

  언제나 난 당신 편이에요

  일어나요, 내가 손을 뻗을게요

  내 손 잡아요, 내가 일으켜드릴게요

  그대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변하지 않아요

  가끔 표현이 서툴고 부족해도

  그댈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걸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이젠 내가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켜줄게요.

  사랑해요

  나의 아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시의 전광판들이 눈앞에 일렁거렸다. 그리고 유독 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으면 바뀌지 않습니다. 움직이면 인생이 변합니다.’

  한 운동복 광고였다. 그 광고를 보곤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끊어지지 않은 족쇄


  “기호야 가게 잘 보고 있어라. 여기 한 바퀴만 뛰고 올게.”

  광고를 본 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영업 준비 때문에 아침에 뛰지 못하면 오후에라도 뛰었다. 처음엔 숨이 벅차오르고, 목이 따가웠지만 며칠 좀 하다 보니 이 고통도 익숙해졌다. 오히려 고통이 느껴져야 제대로 뛴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기호도 지난번 콘서트를 다녀온 뒤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듯했다.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내 도움이 필요해 보이 법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할 일은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기에 가끔 근무 시간에 스마트폰을 보는 것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너는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

  “아직은 비밀이에요. 나중에 좀 더 잘 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희한한 기호였지만 그런 모습에 익숙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매출은 점점 바닥을 보였다. 사실 최근 몇 달 동안 사비를 털어 기호의 월급을 주었다. 아내는 인건비를 줄이자고 기호의 출근 시간을 대폭 줄이라고 소리쳤지만 유일한 나의 대화 친구를 멀리 하고 싶진 않았다.

  “여보, 가끔은 그 고집을 꺾을 때도 있어야지. ”

  몇 번이고 되새긴 말이었지만 그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들어오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녀와 대화를 피하기만 할 순 없었다. 타협점이 필요했다. 그 대화를 먼저 이끈 건 라현이었다.

  “당신, 앞으로도 이렇게 매출 바닥나고, 빚 쌓이면 압류 딱지가 붙을 텐데 혹시 아버님처럼 되고 싶은 거야? “

  라현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가식적인 부모님의 눈물, 집 곳곳에 붙은 붉은 딱지, 목을 매단 아버지, 링거를 맞으며 누워있는 어머니. 그 장면이 고스란히 내게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내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한 듯했다. 그러나 오히려 나의 분노는 훅, 차오르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깬 건 혜민의 도어록 누르는 소리였다. 아내의 시선이 혜민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꿈틀대던 손을 파르르 떨 수 있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어, 다녀와.”

  현관 밖에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러나 반팔 차림이었음에도 이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차가운 아내의 말 때문이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기호의 얼굴을 마주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여러 번 연습하고, 되뇌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호도 내가 할 말을 눈치챘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를 자르시려는 거죠?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알바 시간이 확 줄어드나요? ”

  ”어어…… 맞아. “

  “잘됐네요. 마침 요즘하고 있는 것도 있고, 사장님한테도 너무 죄송했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미안한 건 나지.”

  “무슨 말씀이세요. 사장님 제 월급 사비 털어서까지 주는 거잖아요. 월급 받을 때마다 얼마나 찜찜하고 속상했는지 몰라요. “

  가게의 매출을 기호가 모를 리 없을 거라곤 예상했다. 그러나 내 사비까지 써가며 월급을 줬다는 사실까지 알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하고 있는 일 열심히 해라. 그것이 네가 이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값질 수 있어.”

  “사장님 오늘은 안 뛰세요? ”

  기호가 말을 돌렸다.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의 질문에 어물쩡거리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뛰고 오세요. 다녀오실 때까지만 여기 지키고 있을게요.”


  기호의 말을 따라 무작정 뛰었다. 숨이 헐떡이고, 목이 따끔거리고, 땀이 흘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건 기호에게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라현에게 멋진 남편이, 혜민에게 멋진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결국은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그 남자, 아버지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가 내 발목에 건 족쇄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라현은 결국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혜민에 대한 양육권마저 본인에게 있었다. 이 집도 라현의 명의였기에 이혼을 하게 된다면 내게 남는 건 이 둔해진 몸뚱이 하나가 전부였을 것이었다.

  “이제 지쳐. 혜민이도 지쳤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혜민이 대학 갈 나이야. 애 등록금은 감당할 자신 있고? 이게 맞는 것 같아. 혜민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그녀의 말에 어떤 말도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합심해 나를 속이는 것보단 모녀가 한심한 아비를 등 돌리는 게 가장 깔끔하지……

  한참 동안 그녀가 건넨 서류를 바라보았다. 내가 혐오하는 건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점점 무(無)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無)가 발산하는 기운이 살갗에 와닿을 때마다 움츠러드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나는 뛰지 않았다. 여전히 시내 한복판엔 ‘가만히 있으면 바뀌지 않습니다. 움직이면 인생이 변합니다.’라는 광고판이 밝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간판을 볼 때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의미 없더라…… 씨발.”

  두 남자가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주었던 곳을 지나도, 처음 달리기를 했던 공터를 지나도 나에게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저 군대 가요.”

  “응? ”

  기호가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가 아직 군대를 가지 않은 사실도, 이제 곧 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통보는 어떤 판단도 곧게 설 수 없도록 하였다.

  “한 달 뒤에 논산으로 가요.”

  “그래, 그래. 기호 너도 곧 군대에 갈 나이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남은 한 달 동안 월급 안 받아도 되니까 어서 새 직원을 구해요. 인수인계 확실히 하고 가겠습니다.”

  “인석아, 그래도 돈은 줘야지.”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

  동공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거절을 했으나 기호의 고집을 쉽게 꺾을 순 없었다. 결국 기호의 말대로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인터넷과 앱에 올렸다. 기호는 내 옆에서 어벌쩡한 경력과 자기소개는 모두 걸러 넘겼고, 두 명을 골라 면접을 보자고 했다. 마치 한 회사의 인사관리직 같았다. 이력서를 쳐다볼 때 날카로운 눈빛, 면접을 볼 때 던지는 예리한 질문 등은 사장인 나도 당황케 만들었다.

  “이렇게 걸러내지 않으면 사장님이 저 만나기 전 같은 아르바이트생들만 만나서 고생한다고요.”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을 뽑는 건 전부 기호의 몫이었다. 그렇게 기호는 사흘 만에 괜찮은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뽑았다.

  “인수인계까진 제가 하지만 그다음은 사장님 몫입니다. 갑자기 그만두거나 도망가면 전부 사장님 탓이에요.”

  “그래. 내가 책임지마.”

  “뛰고 오실래요? 아직 저녁 시간까지 많이 남았는데”

  기호의 시선이 다시 볼록 나온 내 배로 향했다.

  “요즘 잘 안 뛰셨나 봐요.”

  면접 때만큼 날카로운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꾸준한 게 가장 중요하대요. 올라가는 건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올라가지만 떨어지는 건 순식간인 것처럼 한 번 놓아버리면 다시 볼록 나온 뱃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요.”

  “이제 날 가르치려 드는구나.”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

  ”그래. 우리 본 세월이 있는데. “

  잠시나마 라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찢어질 듯한 심장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쿵쾅거렸는데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 가게를 하기로 다짐한 것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도피처였구나.’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순간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크기가 가장 큰 닭을 하나 골라 냉장고에 따로 빼두었다. 빼둔 닭은 가게 마감이 되고 나서야 꺼내 튀겨냈다.

  “기호야, 생맥주 두 잔만 따라라. “

  명분은 그저 몸 조심히 갔다가 전역하라는 의미였다. 처음으로 기호와 알코올이 포함된 음료를 마셨다. 느끼한 튀김옷을 시원한 생맥주가 탁, 잡아줘 몇 번이고 생맥주를 따라 마셨다. 기호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나도 발음이 어눌하게 새어 나왔다.  

  “기호야. 넌 분명 잘 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걸 밀고 나가. ”

  “하하……. 사실 그게 잘 안 돼서 일단 군대에 가는 것도 있어요. “

  “아, 참. 전에 네가 하던 거. 그럼 이제 뭐였는지 물어봐도 되나? ”

  기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무언가를 몇 번 터치하더니 이내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뒤집은 스마트폰 위로 처음 들어보는 듯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술기운이 오르지 않고 이 전주를 듣더라도 음악이 독특하단 생각은 했을 것이었다. 손으로 턱을 짚고 한참 동안 그 노래를 들어보는데 기호가 쑥스러운지 노래를 꺼버렸다.

  “이런 거예요.”

  “직접 작곡한 거니? ”

  “네. ”

  “독특하네. 마치 네 성격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들으며 고개를 흔드는 거. 전에 봤던 콘서트처럼 긴 시간 내내 고개를 흔들지 않아도 좋아요. 딱 3분. 3분이라도 좋으니 제 노래에 고개를 흔드는 게 제 꿈입니다.”

  “너랑 잘 어울리네.”

  기호는 자신이 말을 뱉어놓곤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댔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맥주잔을 들이대 서로의 잔을 맞닥뜨렸다.

  “아무래도 사람을 더 만나보려고요. 그런데 저처럼 대학도 안 나오고, 친구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사람한테서 그나마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군대뿐이더라고요.”

  “그렇지. 거기도 별난 사람들 수두룩하게 모여있지.”

  “다시 천천히 시작해 보려고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다시 시작한다……. 애초에 기호는 넘어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본인의 한계를 깨달을 줄 알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부럽게만 느껴졌다. 만약 내가 기호의 나이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걸 깨닫고, 어떻게 판단했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을 보고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타협하지 마.”

  “네? ”

  “타협하지 말라고. 이 세상이랑. 타협하는 순간 삶이 불행해져. 네가 원하는 걸 내려놓고 세상이 요구하는 틀에 맞춰가기엔 인생이 아깝잖아. “

  기호에게 내 진심이 닿았을 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에 최대한 모든 것을 함축시키고 싶었다. 아내와 타협했기에 이혼 도장을 찍었고, 혜민과 타협했기에 양육권을 넘겼고, 아버지와 타협했기에 빚더미란 족쇄를 발목에 채웠다.

  “기호야. 개척은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더라고.”



  다시 현재의 연호


  민소매에 팬티만 입고 티브이를 보는 나. 옆엔 캔맥주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잠시 빠졌던 선잠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5년 전에 잃었던 라현, 혜민 그리고 기호.

  기호를 보내고 동네를 뛰는 일은 다시없었다. 그저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기호의 안목은 물론 훌륭했다. 그때 기호가 뽑은 아르바이트생도 훌륭했고, 치킨집이 있던 동네는 갑작스레 SNS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부지가 올랐다. 그러나 희망은 아주 잠깐이었다. 매출이 오르자 주인이 임대료를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올렸고, 아득바득 높은 물가를 이겨내려 했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한 내가 세상을 이길 순 없었다.

  임대인은 결국 치킨집을 매각하고 그 자리에 카페를 하나 놓았다. 카페는 순식간에 손님들로 가득 찼고 거기서 내 한계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됐다는 사실과 타협했다.


  아마 기호가 한 번은 이 가게를 찾아왔겠지. 만약 찾아왔다면 가게에 들어와 반갑게 인사했겠지. 그럼 서로의 존재가 공백이었던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늘어놓는 거야. 아주아주 두꺼운 책의 종잇장을 한 장씩 넘기는 것처럼 길었던 공백을 채워나가는 거야.

  라현과 혜민이도 한 번쯤 나를 떠올렸겠지. 참, 혜민이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겠구나. 그럼 이 아빠가 사주는 생맥주를 함께 마시며 네가 툴툴거리는 모든 것들을 가만히 들어주겠지. 그 어떤 터무니없는 것들이라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거야. 모자란 아빠지만 나는 언제나 네 편이었거든.

  라현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때 한강 다리 위에서 날 붙잡아줘서, 바나나 우유를 건네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다고. 야속하게도 가난은 이 말 한마디도 어렵게 만들더라고.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결국 난 아버지가 채운 족쇄를 풀 수 없었다. 끊기로 다짐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라이터는 작은 불씨만 희미하게 보이곤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마음 편하게 담배도 못 피게 해 주네. 이 좆같은 세상은.”

  그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버지처럼 목을 매달거나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처참하게 뭉개진 내 시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거라고.

  결국 내가 한 선택은 차 안에서 연탄을 피우는 것이었다. 간신히 불이 붙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가는 게 소원이었지. 그런데 꽤나 이루기 어렵더라.”

   매캐한 연기가 코와 목을 찌를 때마다 눈물이 고였다. 12시 25분. 난 눈을 감았다.


  견인차에 매달린 채 눈을 뜨고 각박한 세상이 참 미웠다. 한껏 일렁이는 한강에 비추어진 햇빛이 두 번째 죽음까지 실패해 버리는 실패자라고 비웃는 듯했다.

  차는 5년 전,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를 들어섰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만에 동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들과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 심지어 버스킹 공연을 위한 단상까지. 내가 없어도 세상은 너무 잘 돌아갔다. 세상과 타협해 그 틀에 맞춰가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란 톱니바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한참 추억에 젖을 즈음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빛이 살짝 바랬지만 여전히 동네에서 가장 큰 간판임을 자랑하는 운동복 간판.

  ‘가만히 있으면 바뀌지 않습니다. 움직이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 간판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건 지 모르겠었다. 그래서 더 크게 웃었다. 언제 또 이렇게 웃을지 모르니까.



  기호


  전역을 하자마자 집보다 먼저 치킨집을 들렀다. 그러나 분명 가게가 있어야 할 곳엔 카페가 들어서 있었고, 카페 주인에게 치킨집을 물어보았지만 너무 오래돼 모른다고 했다.

  사장님의 아내분은 번호를 바꾼 듯했다. 그렇게 나와 사장님의 인연은 종결이 나버렸다.


  매주 토요일. 나는 치킨집이 있었던 카페에 가 책을 읽었다. 이젠 카페 사장도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굳이 주문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올 시간과 주문할 메뉴를 맞춰 내왔다.

  “여기 결제해 주세요.”

  “오늘은 안 받아도 돼요.”

  “왜죠? 오늘 특별한 날도 아닐 텐데.”

  “원래 저희 카페는 열 번 오면 음료가 무료랍니다.”

  “제겐 그걸 인증할 법한 도장 같은 게 없는걸요.”

  “그래서 일일이 셌어요. 어차피 매주 토요일마다 오시니까. “

  “아, 네……”

  벌써 이 카페를 찾아온 지 열 번이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짧았던 머리카락도 많이 자라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고 싶은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동네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가 저 앞을 열심히 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저기는 주방, 저기는 2번 테이블, 저기는 창고. 가끔 카페를 두리번거리며 예전 치킨집 구조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빽빽하게 늘어진 글씨가 일렁거렸고, 문장들을 읊는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다른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고작 광고판 한 번 보고는 매일 뛰기로 다짐한 것. 그리고 정말로 매일 동네 한 바퀴라도 뛰고 오는 것. 처음엔 그가 우스웠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콘서트를 보고 온 나도 다짐하게 되었다. 내 꿈을 위해 움직이자고. 돈도, 인맥도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끊임없이 설쳤다. 유명 DJ에게 인스타그램 DM도 보내고, 음반 회사에게 내 노래를 압축해 메일로 몇 차례 보내고, 모았던 군적금 일부를 한 쇼핑몰에 주며 내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내게 정말 열심히라고 박수를 치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설친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나는 그 두 저울에 아량곳 않고 끝까지 돌아다녔다. 아니,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따라.

  이런 유난에도 불구하고 매주 찾아오는 이 카페만큼은 내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더 널리 알려지고 나서야 노래가 흘러나왔으면 했다. 그게 그가 없는 이 공간한테 더 떳떳할 것 같았으니까.


  ‘당신이 보낸 음원을 리믹스해서 쓰고 싶습니다.’

  한 DJ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제목처럼 내 음원을 리믹스해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곧 열리는 큰 페스티벌이었다. 나는 수락한다는 답장을 보내면서도 앙 깨문 입술을 가만 둘 수 없었다.

  ‘왜 나를 직접 부르지 않는 걸까.’

  미처 알지 못했다. 나도 점점 이 세상과 타협하고 있음을. 어쩌면 인지하고 있으나, 애써 부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텅 빈 메일함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것이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내 현실이었다.


  “오늘은 독서를 안 하시네요.”

  카페 사장이 물었다.

  “그냥…… 오늘은 뭔가 책 읽는 것 말고 생각을 좀 하고 싶어서요.”

  가만히 앉아 커피 향을 맡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 요즘 카페는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것. 아님 옹기종기 모여 떠드는 것 외엔 어떤 장소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나 존재할 법한 문장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소설 속 인물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기다리던 사람을 마주하는 것. 이 얼마나 소설 같은 장면인가. 너무 망상에 빠진 듯한 내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페엔 잔잔한 피아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고 그의 자취를 추적했다.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그 얼굴을 떠올리며 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혹시 아직 여기 전 가게 사장님을 찾고 계신 거예요? ”

  손님이 어느 정도 빠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가 물었다.

  “네.”

  “뭐, 그분에게 돈 빌려준 거라도 있었나요? ”

  “아뇨. 오히려 갚아드려야 할 게 있는 분입니다.”

  “의외네. 빚쟁이일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럴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저희 가게를 자주 와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데 제가 듣기론 이미 그분은 이혼하고 아내 명의로 된 이 근방 집에서 쫓겨났을 거예요. 적어도 이 동네에서 그분을 찾을 순 없지 않을까요? “

  대충 예상은 했다. 사장님이 사모님과 이혼했을 거라고. 그럼 당연히 혜민이의 양육권도 사모님께 갔을 것이었다. 더욱 그의 자취는 미궁으로 빨려 들어갔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가게를 나섰다. 아마 오늘이 마지막 방문일 거라 여기고 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때 촌스러운 치킨집 간판이던 카페 위를 한 번 보곤 뒤를 돌았다. 그때, 카페 사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거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미안해서 드리는 거예요. 난 처음에 전 사장님한테 해코지하려고 찾는 줄 알았으니까. ”

  그녀가 건넨 건 작은 쪽지였다. 글씨체를 보아하니 연호 사장님의 글씨도, 카페 사장의 글씨도 아닌 듯했다. 때마침 떠오른 한 글씨. 미음(ㅁ) 자를 흘려 쓰던 글씨. 전에 내가 뽑았던 아르바이트생의 이력서 글씨와 같은 글씨였다.


  그녀는 사장님이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옆에 있었을 것이었다. 사장님의 사정도 어느 정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아마 내 예상보다 더 오래 일했다면 그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꼰대에 가까운 남자였으니까. 그녀가 분명 내가 사장님을 찾아올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장님은 아무도 없는 산 밑으로 가고 싶다고 했어요. 바다는 춥다고 싫다나, 뭐라나. 아 참,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야 하나 하고 혼잣말을 자주 중얼거렸어요. 대놓고 위치를 알려주진 않았지만 제가 추측해서 적은 주소입니다. 만약 사장님을 만나러 오셨다면 한 번쯤 찾아가 주세요. 정말 친절하고 따듯하신 분이었는데 가끔은 갑자기 자살하실 것 같아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렴풋이 들은 적 있었다. 연호 사장님의 아버지. 그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묻힌 곳으로 간다는 건 나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이 쪽지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적은 주소는 상세한 주소가 아닌 충청남도에 위치한 한 지역과 마을 이름에 약도만 대충 그려져 있었다. 나는 쪽지를 꽉 쥐고 쪽지에 적힌 곳으로 향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


  두 번째 자살 실패를 맞이하고 다시 아버지 옆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그토록 혐오하던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을까.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쫓겨나기 전, 연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토록 눈물을 흘리고선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눈물자국을 보여준 그의 얼굴.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더 이상 개척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타협한 길을 묵묵히 걷는 것. 그 길은 아버지를 따라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 나는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뜻에 쉽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죽음도 쉬운 건 아니었다. 가끔은 아버지도 단 번에 목숨을 끊은 건지, 몇 차례 실패를 거쳐 목숨을 끊은 건지 묻고 싶었다.


  다시 민소매 차림에 팬티만 입고 캔맥주를 들이켜는 나. 실패자 김연호. 아버지와 다를 게 없는 아들. 온갖 타이틀이 내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다시 다음 주 수요일이 되면 세 번째 시도를 해야지. 이번엔 실패하지 않도록 남은 시간 동안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거야. 어떤 변수에도 꿋꿋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온갖 계획을 세워보았다. 한 가지 전제조건을 두고. ‘절대 남에게 민폐를 끼 지지 말 것.’ 이 조건 탓에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만 했다. 볼펜을 꺼내 온갖 상상을 해가며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역시 또 갑작스레 나타난 변수는 내 계획을 막아 세웠다.


  “사장님.”

  “결국 찾아왔네. 너는 참 독특해.”

  “사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늠름해졌구나. ”

  “그렇죠. 사장님은 달리기 아직 하시나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

  “제가 잠시 지키고 있을 테니 한 바퀴라도 뛰고 오시죠.”

  농담이라고 하기엔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차가웠다.

  “이제 내 몸이 따라주질 않아.”

  “그럼 제가 같이 뛰어드리죠. “

  어쩌면 아직 이십 대 중반 남자아이의 고집일지도 몰랐다. 그 농도는 피보다 짙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꺾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기호와 함께 뛰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가쁨, 차가움. 이 모든 것들이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말해주는 듯했다.


  “전투뜀걸음 뒤론 처음이네요. 이렇게 뛴 건.”

  “엄살 부리긴.”

  기호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미소를 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호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만족한 듯 씩, 웃어 보였다.

  “요양 잘하고 오세요. 이건 제 연락처니까 연락 좀 하시고요. “

  독특했던 기호는 그렇게 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호라는 변수 탓에 계획이 틀어졌다. 라현이 건넨 바나나 우유 탓도, 자동차 창문이 열린 탓도 아니었다. 그냥 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호는 끝까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걸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연호처럼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후회를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타협하지 않기로 한 건 끝을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연호는 기호가 찾아왔던 밤 이후로 한참 동안 잠에서 깨지 않았다. 동면에서 깨어난 곰처럼 꽃이 피어날 즈음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호는 아버지의 무덤 위 피어오른 꽃 한 송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연호가 콧잔등을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아버지 묘 앞에 주저앉았다.

  “내가 여기로 온 이유를 알겠네.”

  그는 깊은 잠에 빠지기 전, 그렇게 들이켜던 맥주를 아버지의 묘에 뿌렸다.

  “자기 자식만큼은 본인처럼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건 부모라면 다 똑같구나. 난 당신도 마찬가지일 줄은 몰랐어. 그게 그렇게 전해주고 싶었구나. 근데 아버지, 유감이야. 이걸 알려준 건 당신이 아닌 기호야.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 남자아이가 알려줬어. 그렇기에 난 더욱 당신을 부정할 거야. 라현이와, 혜민이와는 타협했지만 적어도 당신과는 타협하지 않을래. 그 좆같은 족쇄, 내 발목에 매달지 않을 거야. “



  봄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변하게 해 줬다. 유튜브에 올린 내 노래의 조회수가 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분명 어둡고 칙칙하지만 빨랐기에 매력 포인트가 전혀 없었는데도 긍정적으로 변한 사람들은 내 노래를 들었다. 아직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먹고 살 정도였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숫자가 늘어나질 않았던 메일함도 조금씩 문의 메일이 도착했다. 언제 이 관심이 끊길지 몰랐기에 나는 더 설쳤다. 더 많은 메일을 돌렸고, 더 많은 곡을 만들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다시 시작했던 때를 떠올리며.


  사장님이 날 찾으러 온 건 3월 말 즈음이었다. 곳곳에 분홍 빛깔로 칠해진 벚꽃 탓에 그의 얼굴이 한 층 더 밝게 느껴졌다. 일종의 착시겠지 싶었다.

  “요양은 잘하셨나요? ”

  “물론이지.”

  “홀가분해 보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잃을 게 없잖니. 그 말은 타협했던 것들이 다시 무(無)로 돌아갔다는 거지. “

  “잘됐네요.”

  “이제 움직여야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

  “그때 약속 아직 기억합니다.”

  “내가 언제 약속 어기는 거 봤니? 일단 여기 동네 한 바퀴만 뛰고 오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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