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신 열어보지 못할 일기장
2007.04.13 (네가 태어났을 때)
다시 살 수도, 다시 태어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너를 돌릴 수 없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훨씬 컸다. 수차례 기도했고, 끊임없이 부정했다.
‘머리가 크니까 남들보다 똑똑하겠지. ’
케이지 안에 곤히 잠든 너를 보며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너를 지우고 싶었다. 이 세상의 빛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를 품에 안을 수 없었다. 너를 안기에 너의 머리는 너무 컸고, 나의 품은 너무 좁았으니까.
2020.03.13
네가 치매에 걸렸다는 통화를 받았을 때, 너의 엄마는 한참을 울었다. 집에 돌아오니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눈에 띄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굳게 잠긴 너의 방 너머론 닭살 돋는 고요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수반한다. 이 수학적 근거는 참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 어떤 의사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방황하는 너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커다란 머리를 탓했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우리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2020.04.22
푹 숙인 진하의 고개는 지저분한 뒷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의 몸집보다 큰 가방이 자세를 흩트려 트리는 데 한몫하는 듯했다. 그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 건 다시 아내가 눈물을 쏟는 촉매제가 되었다. 나는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 위로 손조차 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울먹이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앙 다문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 티브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티브이에 나온 연예인, 방청객 할 것 없이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차마 그들을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진하가 창밖이 어둡다는 사실을 나가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었다.
2020.09.03
너는 점점 전이되는 증세를 견딜 수 없었다. 아직 젊으니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도 참이 아니었다. 천천히 너의 기억을 갉아먹히며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낼 네가…… 어쩌면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부모라는 권한을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라는 변명으로 그 죄책감을 억지로 덜어냈다. 이제 너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너를 보며……
2021.07.29
약이 드는 속도는 치매가 전이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 속도와 비례해 내 가슴 깊이 파고드는 죄책감도 빠르게 퍼져갔다. 난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등을 돌렸다. 아내마저 등을 돌렸다면 너는 아마 여기 없을 거였다. 그러나 아내는 꿋꿋하게 너를 품에 안았다. 너는 너의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너의 긴 손톱에 아내의 얼굴에 상처가 났지만 그녀는 너를 더 꽉 끌어안았다.
이제 아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는 일도 없었다. 다행인 걸까.
2021.09.12
아내는 결국 진하를 특수학교로 보내기로 했다. 그의 담임 선생님도 그게 더 좋을 거라고 했었다. 제출한 특수학교 입학서는 반송당했다. 그의 병명이 장애가 아닌 치매였기에 특수 학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게 학교 측 답변이었다. 이번에도 아내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특수학교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높였다.
교장은 심의를 더 거친 후 답변을 준다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한편으론 네가 안타까웠다. 나도 널 받아주지 않으려 했는데 학교마저 널 거부하는구나.
2021.09.13
결국 진하는 특수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다. 아내의 거친 통화가 한몫했을 것이었다. 그가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괴롭힘만 받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내 유일한 양심이었다.
2021.12.24
네가 사라졌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모두가 널 애타게 찾을 때 나는 차가운 공기를 만끽한 것이었다. 날이 저물고 얼굴과 몸에 상처가 잔뜩 난 너를 찾았을 때 안도감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지긋지긋했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희망이 순식간에 무너진 셈이지.
실종신고가 접수되고 가장 너를 애타게 찾은 순경이 있었다. 그는 밤이 될 때까지 겉옷도 걸치지 않고 한참을 뛰어다녔다. 얼굴엔 가시덩굴에 스친 상처가 가득했다. 결국 널 찾고 난 뒤에 저녁으로 그를 순댓국 집에 데려갔다. 그는 하루종일 굶었는지 특대를 시켰음에도 아주 게걸스럽게 국밥을 해치웠다. 반면에 나는 김이 다 식기도 전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어서도, 그에게 미안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배가 불러서였다.
캄캄한 수풀 속에서 너의 손을 잡은 잡고 나오는 순경은 나보다 더 아빠 같았다.
2022.04.13
생일 축하해.
2022.05.05
네가 어린이날 선물을 달라고 한 건 5년 만이었다. 아마 특수학교 교육의 영향이 컸을 것이었다.
‘진하는 이제 어린이 아니지? ’라고 말한 건 충분히 네게 상처가 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직 산타가 있다고 믿는 너인데 어린이날도 네겐 선물 같은 날이었겠지. 5년이나 잊혔던…… 선물 같은 날.
2022.07.30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죄책감은 심해와 같은 어둠. 그 안에서 나는 심해어처럼 헤엄친다. 보이는 것 하나 없기에 감각에만 의존해 유유히 헤엄친다.
심해어는 눈이 퇴화된 것이랬다. 그들은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앞을 볼 수 없었더라면 너를 안아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2022.11.02
낮이 밤보다 짧아졌다. 나태주의 ‘11월’이란 시에선 그 이유로 당신을 더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너를 찾아갔지만 공허한 너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나의 다짐은 증발돼 사라졌다. 젖은 너의 머리를 말려주는 아내는 어떤 다짐을 했기에 널 그토록 사랑할까.
2022.11.19
아주 평범한 가족을 보았다. 그들은 아주아주 평범해서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부셨다. 그 어떤 가족 부러울 것 없어 보였다. 평범한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2023.01.02
여전히 낮은 밤보다 짧았다. 네가 눈을 뜬 시간은 감은 시간보다 짧았다. 이제 너와 대화조차 어려워졌다. 아빠,라는 단어를 못 들은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평생 듣지 못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네가 너무 안타까워 잠든 너를 한 번 안아보았다. 어깨에 커다란 너의 머리가 닿았다. 새근거리는 너의 숨결이 가슴을 간질였다. 그리고…… 따듯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 따위는 사실 없었다. 그저…… 널 부정하고 싶었던 건 내가 부모란 자격을 박탈당할 이유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2023.04.20
결국 넌 눈을 뜨지 못했다. 이제 낮이 밤보다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아빠라는 단어도 듣지 못했다.
아내는 참아왔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어찌나 오래 울던지 하루종일 그녀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제는 차가워진 너의 팔을 어루만져도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주 멍청한 생각이지만 팔을 연신 주무르면 따듯해질 것 같았다. 그러다 다시 너의 팔을 내려놓은 건…… 나는 사랑한다는 말 따위 들을 자격 없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