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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 김종남 Jan 20. 2023

디지털 시대에 낙서가 필요한 이유

시는 암송보다 손으로 써보는 사람이 진짜 주인이다

이면지가 넘치는 세상이다.

 A4 이면지는 회의나 모임 때면 수십 장씩 생긴다. 

왜들 한쪽만 프린트하는지, 낭비가 심하다.  

이면지를 쌓아놓고 만년필로 시도 필사하고, 붓펜으로 한자도 그려본다.

낙서가 있어 행복하다.




낙서 취미가 생겼다.  마음을 풀어놓는 심심풀이이다. 이왕이면 붓펜이나 굵은 펜 만년필로 큼직큼직 써내려야 기분이 잘 풀린다. 신문 읽으면서, 티브이 보면서, 얘기 들으면서 단어를 써보기도 한다. 마음에 닿는 문장이 나오면 필사도 한다. 한자 낙서가 제일 재미있다. 뻔한 단어도 한자로 쓰면 한 자 한 자 깊은 의미를 가진 그림이 된다. 붓펜으로 쓰면 서예 배울 때 손맛이 돌아온다. 악필도 추상화처럼 멋지게 그려진다. 


21세기는 펜보다 키보드를 더 많이 쓰는 디지털세상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온종일 키보드 두드리며 사는 직장인들도 많다. 예전 사람들이 만년필 고르듯, 요즘 사람들은 키보드를 고른단다. 손맛이 좋도록 나무로 만든 키보드, 옛날 타자기처럼 타다닥 소리를 내는 키보드도 있다. 나도 서랍 속에서 오래 묵은 만년필을 찾아냈다. 3개나 된다. 세필, 중필, 굵은 펜, 기분에 따라 골라잡는다.      


 이면지 낙서는 꼭 심심할 때만 효험이 있는 건 아니다.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다가 글이 잘 안 나갈 때면 만년필을 쥐고 이면지에 낙서를 한다. 마감이 많이 남아있을수록 느긋한 탓인지 잡념이 많아진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개발새발 그려본다. 수십 년 손에 익은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집중력이 살아나기도 한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만년필이 필요한 이유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남자의 물건>에서 ‘한 개에 수십만 원짜리 만년필을 사들이는 취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렇게 진기한 만년필이 여러 개 있으면 그것들을 오래 만져보고 싶어서라도 더 많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시인 고은 선생은 시를 쓸 때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을 고집해서 쓴다고 했다. “잉크를 찍는 여유, 거칠거칠한 펜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누르는 그 감촉,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그 느낌을 즐긴다.” 십수 년 전 직접 들은 얘기다.     

"커피 한잔 앞에놓고 종이질이 아주좋은 수첩에 만년필로 끼적거릴 때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다."  <남자의 물건> 155쪽


 곁에 이면지가 쌓여 있다. 잉크가 가득 담긴 만년필을 손에 쥔다. 굵직한 펜이 사각사각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하얀 캔버스에 검푸른 잉크가 흐른다. 추상화 같은 한자들이 춤을 춘다. 오수환 화백은 서양화에 서예를 접목한 추상화가로 유명하다. 오화백은 “추상화는 내면에 있는 무의식을 끄집어내 시각화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만년필 낙서는 바로  문장의 뜻을 시각화하여 그려내는 추상화이다. 


 추상화 낙서는 일기를 쓰기전 초본이다. 일기장은 제2의 낙서장이다. “ ① 解決하고 싶은 問題를 종이에 쓴다./ ② 골똘히 集中한다./ ③ 答을 쓴다. / 天才 物理學者 파인만의 3段階 問題解決方式. / 問題가 무엇인지 알아야 問題를 종이에 적을 수 있지--/ 問題를 종이에 쓸 수 있다면 問題가 무엇인지 아는 거다.” 한자 투성이인 지난해 9월 30일 자 일기장이다.      


 낙서중 최고 재미는 시 낙서다. 같은 시를 수십 번 써보아도 언제나 새롭다. 지난 7월 2일 자 일기장엔 <저녁에 /김광섭(金珖燮;1905~1977) > 시를 적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 시는 소리내어 외우다 손으로 쓰면 더 깊어진다. 손글씨 쓰는 사람이 시의 진짜 주인이다.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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