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꼭 모여야 해!
다른 날도 아니고, 결혼식이니까!
우리 가족에게 명절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었다.
내가 대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늘 명절에는 꼭 집에 와서 부모님과 함께 친가, 외가를 다녀오는 것이 항상 우리 가족의 루트였다. 친가에 가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엄마와 함께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게 일이었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성인이 된 이후로 카페에서 동생과 종종 시간을 보내며 '언제 명절이 끝나나?'를 외치며 집에가고 싶어했다. 이 명절은 도대체 누굴 위한 명절인가. 나이 50이 넘도록 하루종일 부엌에서 아직도 전을 만들고 튀김을 하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는 엄마와 그 동안의 회포랍시고 고스톱과 오고가는 술잔속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누나와 형들에게 핀잔을 듣는 아빠까지. 누구를 위한 명절인지 모를 명절이 우리 가족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절' 은 그저 우리 가족에게 '휴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명절에 바빠서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에 서운해하거나 큰일이 난 것처럼 어수선떨지 않는다. 명절에 못온다면 그저 그 주 혹은 그 다음 주에라도 와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우리 가족은 명절을 보내고 있다.
엄마에게는 셋째 오빠이자 나에게는 셋째 외삼촌. 셋째 외삼촌의 둘째 아들 '영이 (가명)' 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한 달 내내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바쁘더라도 꼭 와주기를 바란다며 신신당부를 했지만 나와 동생에게 그리고 '영이' 에게도 어른들의 왕래 잦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기에 어찌보면 남보다도 더 먼 그저 유년시절의 꼬꼬마였던 기억만 간직한 가족으로 묶인 사이였다.
그래서 결국 동생은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실제로도 바쁜 일상 속에 주말출근까지 불사르고 있는 동생은 몇몇의 고민끝에 처음으로 엄마와 싸운 뒤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엄마는 서운해했고, 나는 그 서운함을 대신하기 위해 외근길에서도 미리 짐을 챙겨 부모님댁으로 향했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아침. 식을 1시간 30분이나 남겨놓고 우리 가족은 일찍이 도착했다.
바로 마지막 예식 순서라서 그런지 앞 순서의 예식을 마무리하는 손님 밖에 없었는데, 기억이라는 것이 그리고 피라는 것이 무섭다. 20년만에 본 친척 동생의 얼굴을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아!'
영이 역시도 나를 잠시 긴가민가 하더니 '누나' 하며 듬직한 손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영이의 와이프와 인사를 나누었고 초등학교 시절에 통통했던 영이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어른들이 하나둘 도착하면서 셋째 외삼촌과 외숙모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영이도 마찬가지였다. 꼼꼼한 성격의 아빠는 60살의 나이에 축의금을 담당했고, 나는 그런 아빠를 옆에서 도왔다.
우리 가족에게 결혼식이라는 행사는 아주 오랜만의 행사였기에 아빠는 축의금 정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버벅였지만 최근까지도 지인들의 결혼식을 참여했던 나는 하나하나 아빠와 함께 축의금과 축하를 하러 온 하객들을 맞이했다.
가족이었다.
몇 십년만에 보아도 내 나이가 34살이 되어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첫째 외삼촌, 둘째 외삼촌, 넷째 외삼촌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외숙모와 조카들까지. 잊고 있던 언니 오빠들까지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20년만에 만난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고등학교 퀸카였던 언니는 어느 새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푸근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며 그 동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며 요즘 어디에서 일을 하느냐며 언제 결혼을 하느냐며. 이런 잔소리가 20년만에 만난 가족들에게는 껄끄럽지도 불편하지도 않고 그저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막내가 결혼을 했고, 막내 결혼식 덕분에 가족들이 모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곳에서 외삼촌과 외숙모를 챙기는 어른이 되었고, 부모님의 자식으로서 먼 친척들에게 이렇게 자랐다는 인사를 하고 결혼이라는 큰 행사를 마친 오랜만에 본 동생을 아주 익숙하게 챙겼다. 땀이 나는 동생을 위해 청심환을 주고, 목이 마르다는 외삼촌들을 대신해 커피 심부름을 했고, 30년만에 만나는 엄마의 먼 친척 가족들에게 나는 엄마의 딸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외숙모들에게 나는 그 동안 잘 지내왔다는 인사와 미래에 내 결혼식에 꼭 초대하겠다는 너스레를 떨며 우리 가족의 경조사가 끝났다.
잊고있던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