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대리 Aug 21. 2024

투박해야 하는 돼지고기김치찌개

어쩌다 장녀가 되어서 그래요

지난 주말, 아빠의 생신을 맞이해서 온 가족이 소집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경조사라 함은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과 남남처럼 지낸 지가 오래되어 그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저녁 한 끼를 먹는 것이 전부인 그런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맏딸이기에 언제나 가족들의 경조사를 나서서 챙기기 바쁘다. 늘 자기 계발을 핑계로 ‘굳이 가야 해?’라는 서른 넘은 철딱서니 없는 동생에게는 한 달 전부터 신신당부를 하였고, 바쁘다는 엄마에게도 아빠 생신에는 꼭 일찍 귀가하라며 귀띔을 해주었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가끔 감수성이 넘치고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깜짝 선물로 건강을 위한 공진단과 최신식 내비게이션 그리고 소갈비 식당까지 예약을 완료했다.


한 달 내내 신신당부한 잔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기어코 늦어버린 남동생은 양주병과 케이크를 손에 들고 연신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지만 아빠는 그런 아들이 좋은 건지 오랜만에 봐서 더 반가운 건지 아들이 도착하기까지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주문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들린 양주를 받으며 아빠는 ‘딸! 사진 좀 찍어줘!’ 라며 연신 기쁜 내색을 온몸으로 표했다. 하룻밤 자고 가는 것도 아니고 덥다는 핑계로 남동생은 저녁에 2차까지 마무리하고 결국 본인의 자취방으로 향했고, 엄마 역시 길 고양이의 밥을 챙겨준다며 돌아섰다.


아빠는 아쉬워했다.


마치 ’ 오늘 아빠 생신기념 식사 끝!‘이라는 알림과 동시에 모두 스르륵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런 아빠의 팔짱을 끼고 전에 없던 애교를 부리며 집으로 향했다. 아빠와 그렇게 시작된 3차에서 나는 괜스레 나에게 켜켜히 묵혀둔 양주를 따라주는 아빠에게 오늘 동생에게 받은 새로운 양주 맛을 보고 싶다며 졸라대었다.


서른 넘은 딸이 남동생의 선물을 탐하다니 참 유치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유치함에 못 이긴 아빠는 기어코 나에게 한마디를 던지며 동생에게 선물 받은 양주를 오픈하였다. ‘딸이랑 아들은 다르지, 아들이 준 건 중요한 날에 먹어야지’


아빠의 의미 없는 한 마디는 결국 서른 넘도록 내가 가진 서운함을 터지게 만들었다.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눈을 떠보니 나는 첫째가 되어 있었다.


늘 맞벌이 부모님 대신에 동생을 돌보는 일도, 커갈수록 나는 ‘당연히’ 잘해야 했고, 동생은 조금 못해도 괜찮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며 첫 회식에 술에 취해 들어온 나는 부모님에게 한 시간이 넘도록 설교에 설교를 듣다가 거의 울면서 잠이 들었고, 동생은 군대 가기 전 열심히 놀다가 술에 잔뜩 취해 들와서는 잔소리가 아닌 다음 날 해장국 그리고 핀잔이 전부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늘 집안의 급한 불은 내 몫이었고, 철없는 동생은 몰라도 괜찮았다. 어느 집이나 있는 가족사의 뒷정리도 항상 동생과 부모님이 모르게 내 몫이 되었고 그 감정 또한 고스란히 내 스스로 해치우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너무나도 이유 없는 당연한 책임감과 무게가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렇게 아빠의 생신은 장녀의 서러움 폭발로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서러움이 곱절인 채로 다음 날 집에 돌아왔다.



따뜻해지고 싶다면
칼칼한 돼지김치찌개가 최고다
대신 모든 재료는 숭덩숭덩 투박해야
그 맛이 살아난다

술은 꼭 소주여야 한다



가족에게 서러움이 터졌을 때는 해결 방법이 없다.


마치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이 서운함은 타인에게 느낀 서운함보다 배가 되기도 하여 마치 텅 ~ 빈 속이 울리는 것 같다. 허기짐, 그리고 춥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더라도 이 공허함과 차가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는 ‘저기압일 땐, 고기 앞!‘이다. 하지만 기름진 고기를 구워 먹는 일보다는 이런 감정이 솟구치는 날에는 따뜻한 국물도 필수다.


그래서 돼지고기도 두툼한 목살을 숭덩숭덩 썰고, 묵은 김치에 고춧가루와 청양고추 그리고 한국인에게 없어서 안될 다진 마늘이 팍팍 들어간 김치찌개가 최고다.


투박한 손길이 필요한 날이다.

그리고 밥도 꼭 밥솥 혹은 냄비로 따끈하게 지어서 먹으면 좋다. 곁들이고 싶다면 이 날은 굳이 소주여야 한다.


주말의 끝자락에서 가족에 대한 생각들로 헛헛함을 김치찌개와 따끈한 흰쌀밥 그리고 소주 한 잔으로 채우니 마음이 조금씩 포근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아빠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미안하다 혹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는 위안의 말 대신에 아빠는 ‘딸, 집에 들어갔나?! 이거 내비게이션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라며 운을 띄웠다. 저녁 9시에 내비게이션을 만지는 아빠라니.. 아빠답게 아빠는 나에게 위로를 건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빠는 늘 이런 식의 사과를 한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빠를 많이 닮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때와 달리 아빠가 내민 사과의 손을 뿌리치거나 모른척하지 않고, 늘 잡는 편이다.  


늘 그렇듯이 나는 투덜거리며 아빠가 이해하지 못할 내비게이션 조작법을 알려주며 다음 주에 가겠노라는 약속을 뒤로하고 아빠와의 전화를 끊었다.


부녀간의 사과는 이렇게 시작도 없고 맺음도 끝도 없다. 그래도 그 끝은 웃음으로 마무리되고, 칼칼한 돼지김치찌개와 소주는 나를 따끈하게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