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와 같은, 불면의 밤들을 떠올리며
저는 아직도 밤이 좀 무섭습니다.
오늘 보낸 하루의 느낌과 상관없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조바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불면증을 겪은 분들이시면, 어떤 의미인 지 대략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불면증 환자들에게 있어 밤은 곧 ‘상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밤 12시나 1시쯤 잠들어 아침 5시에서 6시쯤 깨어나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것뿐이지 평소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만, 계절에 상관없이 해 뜰 무렵이나 그 직전에 잠이 깨면 마치 상을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아마도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수면을 취하고 기상한다는 것이, 제게 큰 자부심이 되었나 봅니다.
아주 어릴 때에는, 자리를 펴고 누워 불이 꺼지면 그저 눈이 말똥말똥해서 잠들기까지 오래도록 멍을 때리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10살 무렵 몇 번 가위에 눌린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시간이 갈수록 ‘수면‘은 제게 불안함의 상징이 되어갔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밤이 되면 항상,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게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늘 잠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등교를 하고 나면 엎드려 쪽잠을 잤고, 다음 교시까지의 쉬는 시간에도 교실 안의 소음을 자장가 삼아 졸거나 잤습니다. 수면이 부족한 청소년이었던 제게, 수업 내용에 집중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공부가 싫었고, 학교에 가기도, 입시를 치르는 것도 모두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주말에 늘어지게 잘 수 있는 아침잠 만이 저의 유일한 낙이었다고나 할까요.
성인이 된 후에는 알코올이라는 고마운 수면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불면 가득한 인생에서 알코올 역시 빠질 수 없는 소재여서, 조금은 길지만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해 두어야겠습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알코올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순간적으로 잠이 들 수는 있으나 그 잠은 결코 숙면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알코올은 건강한 수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인 렘(REM) 수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런 “선잠”을 자면 자는 동안 자주 깨어나고, 코를 심하게 골며 호흡이 불규칙합니다. 질 낮은 수면이 장기적으로 계속되면 학습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나이에 비해 장기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기도 합니다.
네, 누구나 20대에는 과음을 많이 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저의 30대는 어땠을까요?
20대 후반, 저는 와인 소믈리에가 되었습니다. 바텐더 자격증을 따고, 중앙대 평생교육원에 입학해 와인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주변엔 경제적으로 풍족한 애주가들이 넘쳐났습니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텐더/소믈리에를 좋아하며,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제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고, 좋은 술을 함께 마시는 지인들과 작은 일에도 큰 유대감을 느끼며 특별한 유니언을 만들어갔습니다. 당시엔 알코올을 줄여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근무하던 와인바에서 5년간 매니저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매니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엔 각종 주류회사/ 수입사들의 협찬으로 미국 나파밸리, 소노마 카운티를 비롯해 시칠리아의 와이너리에 장기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술’이라는 것을 통해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을 이어갔고, 그로 인해 많은 혜택 또한 누렸습니다. 저녁 6시 출근, 새벽 2시~3시 퇴근을 반복하는 수년간 술에 취해 잠이 들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 잠을 잘 못 자는 아이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이죠.
이후 바뀐 직장(중소기업의 무역 사무원)에서도 술은 중요한 사회생활의 매개체였습니다. ‘술잘알’ 회사원은 거래처나 외국 바이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반 자발적으로 술상무가 되어갔지만, 그 당시에도 불면증에 대한 큰 인식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술 약속이 없는 날에도, 퇴근 후 집에 오면 와인이나 맥주, 위스키 등을 홀짝거리다 잠이 들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30대 후반, ‘이혼 소송’이라는 개인적으로 매우 큰 사건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우울과 불안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이는 40대를 향해 가고 있었으며 육체적 피로감도 커졌습니다. 어김없이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일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늦잠과 지각이 두려워 잠을 더욱 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피로한 잠을 잤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했습니다. 삶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는 불안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렇게 찾은 정신과에서 성인 ADHD, 우울증 진단과 함께 졸피뎀 계열의 수면제인 스틸녹스와 ADHD 치료제를 함께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수면제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의식하게 될 즈음엔 이미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삶이 무너져 가는 상태였습니다.
인식하고 중단하고 회복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될 저의 매거진에서는, 위에서 시작된 상황들로부터 지금까지의 과정과 사례들을 가감 없이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또한 오랜 기간의 스틸녹스 복약과 의존/ 단약과 치유의 과정을 정리해 본다면, 저 역시 의존 재발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면증은 국제 질병 분류 기호(ICD-10)에 G47이란 코드로 엄연히 분류되어 있는 정신질환이며, 다른 질병을 유발하는 부수적인 혹은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치료제가 있거나, 수술로 떼어내 없애버릴 수 있는 병이 아닌 만큼 다른 차원의 접근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최대한 제 경험의 사례를 통해 연재를 이어갈 것이며, 필요한 경우에는 타 서적의 학술적 통계를 발췌/표기하거나, 주변의 전문가 분들(ex: 정신과 전문의, 인지행동 치료 전문의)께 확인을 거듭해, 저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입니다.
혹여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셨거나, 그런 가족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이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