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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경 Dec 13. 2024

알코올 의존증은 아니신 것 같아요.

스틸녹스와의 조우

처음 정신과를 찾은 건 2017년의 봄이었다.


당시의 나는 몇 가지의 이슈로 인해 극단적으로 불안한 심리상태를 겪고 있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밤마다 찾아오는 우울감과 알코올 의존이었다.

2년에 걸친 이혼 소송으로 심신은 지쳐있었고, 그로 인해 본가의 가족들과도 트러블이 잦았다.

충분히 가능할 거라 예상했던 회사와의 연봉 협상이 불발되었고, 새롭게 만나게 된 인연은 유쾌하지 않은 이별로 끝이 났다. 앞으로 영원히 "가난한 혼자" 일 것 같은 스스로가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런 감정을 잊기 위해 매일 밤 유쾌한 멤버들을 골라 술약속을 잡았다. 간혹 약속이 없는 날은 극도로 우울해져, 혼자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고 그런 내 모습에 불같이 화를 내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엄마는 딸의 이혼에 수치를 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는 딸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주말에는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어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밤이 되면 슬그머니 술을 사러 나갔다.


가치도 쓸모도 없는 존재라는 확신.

그렇기에 나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또 생길 것이라는 신념.


나는 매일밤 이런 무의식을, 알코올에 마취된 뇌에 주입시켰다. 그렇게 다음날, 또 그다음 날이 될 때마다 그 신념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갔다. 그나마 회사에서 일하는 8시간은 견딜만했지만, 퇴근 후에는 도저히 감정의 기복이 조절되지 않았다. 이렇게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내년 이맘때엔 내가 살아 있긴 할까?라는 고민이 생길 때쯤, 퇴근길에 들러 갈 수 있는 위치의 정신과를 예약했다.



가격이 조금 부담되긴 했지만 1시간 연속 상담으로 예약했고, 선생님께서 친절하고 세심하다는 리뷰도 확인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간단히 문진을 작성하고 들어가니 스마트해 보이는 중년의 의사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대기실과 진료실 분위기도 매우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어떤 게 힘들어서 오셨나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대뜸,

 

"선생님, 제가 아무래도 알코올 중독인 것 같아요.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 후 20분 정도, 의사 선생님은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왜 내가 스스로를 알코올 중독이라 생각하게 되었는 지를 비롯, 부모님, 형제, 결혼 생활, 이혼 사유, 직장, 연애, 생활 패턴 등등.. 길고 긴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어쩐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시던 선생님은 차트에 뭔가를 한참 적으시고 나서 고개를 드셨다.


"제가 보기에 유경 씨는 알코올 의존증은 아닌 것 같아요. 술을 매일 드시긴 하지만 이게.. 지금 회사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계신 데다가.. 본인 감정을 충분히 잘 파악하고 계시고, 음주의 부정적인 면도 인식하고 계셔서, 음.. 제가 보기엔 우울감 때문에 잠들기가 힘드셔서 술을 이용하시는 것 같거든요? 불면증이죠..일단은 항우울제와 수면제로 증상을 완화하면서 정기적인 상담을 병행해 해결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


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응? 이게 무슨 말이지? 했지만.. 일단은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감부터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근본적 우울감의 원인에 대해 조금 심도 깊게 들어가 보자고 말씀하시며, 성인 ADHD 테스트를 제안하셨다. 그리고 다음 진료 전까지 복용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졸피뎀계 수면제라 설명하시며 원래 첫 복용엔 반알씩 처방하지만, 나의 경우 복용 후 잠들기까지 술을 찾지 않도록 그냥 하루 1알로 처방하신다고 설명해 주셨다. 혹시라도 계속 술 생각이 나거나 하면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도 있으니 이야기해 달라고도 하셨다.


처방전을 받고, 대기실의 테이블에 앉아 30~40분가량 ADHD 테스트지를 작성했다.

꽤나 두꺼운 테스트지를 작성하고, 넘기고를 반복하며, 조금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테스트 문항에 참 공감 가는 문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혹시 정말 그 병이면 어떡하지?' 하고 갸웃거렸지만, 일단 큰 한걸음을 내디뎠으니 시키는 건 열심히 해 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약을 타서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래도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의 의지를 실행하였다는 뿌듯함, 그리고 "괜찮을 거야~"라는 자기 위안.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자기혐오와 부정적 생각을 쓰담쓰담 달래고 다독였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밤이 되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저녁약(항우울제+수면제)을 복용하고, 10분쯤 티브이를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효과가 있으려나? 하며 물끄러미 천정을 보다 갑자기 눈꺼풀이 약간 떨려오는 걸 느꼈다.

흐릿하게 보이는 천정이 '우웅~' 하고 약하게 진동하며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순간 몸의 긴장이 스륵 풀리며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보다 20분 일찍 깨어났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몸이 너무 가벼워서 깜짝 놀랐다. 물론 숙취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설명할 수 없는 개운한 컨디션은 뭐지? 라며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첫 스틸녹스 복약의 효과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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