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자고 아침에 깬다는 것의 기적
스틸녹스 복용을 시작한 지 2주쯤 되면서 삶은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출근길이 즐거웠다. 어둑할 때 타는 출근 버스 안에서 숙취에 기절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업무 능력도 좋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한 일에는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개선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임했고, 이전처럼 매사에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신경질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른바 ‘긍정적 마인드‘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씻고, 수면제를 먹고 깔끔하게 잠들 수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수면제를 복용했으니 내성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매일 한 알 먹는 마법의 타블릿은 숙면을 취하게 해 주고 동시에 알코올도 생각나지 않게 해 주었다.
2주에 한 번은 정신과를 찾아 50분 동안 상담 을 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사실 처음엔 ADHD약 복용을 꽤 망설였지만 의사 선생님의 설득, 그리고 삶의 질이 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처방을 받기로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ADHD약의 부작용인 식욕 부진, 약간의 메스꺼움 등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였던 건 불면증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과도한 각성상태가 밤까지 잦아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마지막 투약 시간을 늘 신경 쓰게 되었다. 나로서는 수면제의 효과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최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부터 이미 수면제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DHD약으로 인해 수면제의 효과가 자꾸만 늦춰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약을 먹고 누워도 처음처럼 ‘훅‘ 잠들지 않기 시작했고, 조금씩 초조해졌다.
다시 숙면을 취하지 못할 바엔 ADHD를 안고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여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스틸녹스를 복용한 지 한 달쯤 되던 시점에, 회사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트레이너와 시간을 지정해 주 4회, 퇴근 후 2시간씩 PT를 받았다.
운동을 시작하면 체중이 감량됨 ->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던 외모에 변화가 생길 것 -> 콤플렉스 하나가 줄어들 것임 -> 근심이 하나 사라지니 잠을 더 잘 자게 될 것.
대략 이런 사고의 흐름이었던 것 같다.
‘이왕 긍정적인 기류를 탔으니 어디 한번 갓생을 살아보자’라는 욕심도 있었다.
게다가 ADHD약을 함께 복용하더라도 퇴근 후 PT로 한껏 몸을 지치게 한다면 더 질 좋은 수면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상담의도 적극 지지해 주셨다.
기상->출근->업무->퇴근->운동->건강식단->수면으로 이루어진 루틴은 10개월 간 지속되었다.
정신적으로는 상담의에게 크게 의지했고, 건강에 있어서는 트레이너의 의견을 99% 반영해 생활했다. 회사에서는 상사의 명만 따르면 되었다.
약을 추가하거나 용량을 변경하는 권한은 의사에게 일임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불안하다가도 상담의에게 ‘정말 잘하고 계시네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곧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
트레이너가 정해준 기상 시간, 식단, 운동량 등을 정확히 지켜냈다.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은 좀 더 양질의 단백질 보충제, 닭가슴살, 샐러드 채소를 찾는 것 정도였다.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 루틴의 반복이, 내게 얼마나 큰 안정감을 안겨주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 이면에는, ” 지금껏 불완전한 내가 한 모든 결정들엔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심각한 불행을 겪어왔지만 이제는 전문가들이 결정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으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 “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남에게 맡겨 버린 이 모든 결정이 낳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10개월 간의 ‘무지성 루틴‘은 9kg의 체중 감량, 만족할 만한 외모, 건강한 육체를 선물해 주었다.
어쩌다 보니 헤어진 남자친구와도 재회했다. 콤플렉스의 부재로 인해 이전 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점점 더 많은 지인과 친구가 생겼다.
그때는 그게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면제는 그 모든 루틴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에 대한 감사함이나 필요성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을 만큼 익숙했고, 자기 전에 양치를 하는 것과 같은 완전한 ‘습관의 일부‘ 였다.
나에게 졸피뎀 제1 적응기는 완벽했고, 기적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수면제를 먹고 잠에 빠져들기까지의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모른 척했다.
어느 날 밤, ‘어쩌지.. 수면제에 내성이 생겨버린 것 같아..‘
라고 정확히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이후부터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자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생각하게 되었다.
스틸녹스 복용을 시작하고 10개월이 지나면서, 나는 불면증이 다시 생길 거란 불안감에 잠들기 힘들어지는 “졸피뎀 제2 적응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음 연재에 계속..)
* 연재에 등장하는 ‘졸피뎀 제1적응기, 제2 적응기‘ 등은 장복 경험자인 글쓴이가 만들어낸 명칭이며, 학계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가 아님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