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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정 Jan 11. 2023

울지 않고 쓸 수 있는 글

우울을 만났다.

   

 "요즘은 어떤가요?"

 "확실히 나아졌어요. 기억력이 떨어진 게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요"


 새로운 약으로 바꾸고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몸에 별 다른 반응은 없는지,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선생님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고, 나는 나아졌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했다. 상담시간이 끝나고 진료실을 나서는 나를 선생님이 다급히 붙잡았다.


 "아녜요. 다정씨는 지금 나아지지 않았어요. 약을 하나 더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붙잡은 손목을 내려다보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은 나를 소파에 앉게 하고는 얼른 티슈를 뽑아 내게 건넸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절망, 나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를 포기했다. 






 극심한 우울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이 이혼하고 이년이 지난 때다. 그전에도 우울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 해는 뭔가 달랐다. 그 당시 나는 아빠의 사업을 도우며 아빠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때는 가족 모두에 대한 연민으로 뭐든 무리해서 할 때다. 나는 아빠가 밖에 나가 아내 없는 티가 날까 싶어 종일 집안일을 했다. 반찬도 매끼 대여섯 가지씩 했고, 매끼 다른 국을 끓여냈다. 매일 집을 청소하고 장을 보고 밥을 차렸다. 매일 빨래를 하고, 옷이 구겨지진 않았는지 매일 확인했다. 집에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아빠의 도시락은 늘 새로운 반찬과 새로운 국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딸이 챙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같이 무리하는 날들이었다. 아빠는 이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걸 극도로 싫어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아빠가 편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면 나는 늘 장을 봐야 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빠와 한 공간에 있는 게 숨 막히게 어색하고 또 힘들어서 잠시라도 바깥공기를 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아지와 둘이 나와 한참을 앉아있다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가계부를 썼다.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혼할 당시 엄마가 아빠돈을 빼돌려서 친정에 줬다는 둥 그 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썼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뭐든 증거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었지만 엄마는 빼돌리기는커녕 엄마를 위해 무얼 할 정도의 여윳돈도 가졌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공격해야 할 순간에 반드시 진실로만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부모님의 이혼으로 알게 된 후 생긴 습관이다. 나는 매일 그날의 지출을 정리하고, 영수증을 챙겨 꼼꼼하게 적었다. 그리고 나면 창을 열고 창 밖의 나뭇잎을 보는 것이 마지막 일과였다. 






 그날은 아빠의 생일이었다. 생선도 굽고, 미역국도 끓이고 한상 거하게 차려 아빠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빠는 그날도 평범하게 식사를 했고, 나는 물만 들이켜는데 아빠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오늘 국 맛있네.’ 그날 맛있었던 음식을 꼭 이야기해주는 아빠는 그날의 미역국이 맛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더 먹으라며 반찬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아빠가 일어나자마자 먹지도 못한 내 밥과 국을 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딸깍, 문을 잠그고 변기 앞에 앉았다. 내내 울렁거리던 속은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먹은게 없어 게워낼 것도 없었다. 


 일주일가까이 먹는 족족 토하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마저도 삼 일 전부터는 물만 마시던 상태였다. 매일 우리는 같이 식사를 했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 편이지만 상대가 일어날 때까지 식탁에 앉아있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늘 아빠가 일어날 때까지 식탁에 앉아있었는데, 아빠는 나와 일주일 동안 매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있으면서 내가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 나는 그제야 내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방치해선 누구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내 발로 병원에 찾아갈 생각을 했다. 






 첫날은 말보다 울음이 많았다. 살려주세요. 간간히 살려달라는 말만 했다. 결국 그날은 진정이 되지 않아 집으로 왔고, 이튿날 다시 병원에 갔다. 그동안 있었던 일과, 현재의 상황, 내 안의 두려움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선생님은 미리 받아두었던 질문지를 찬찬히 보며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입원을 권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모님이 모르게 이 늪에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나 하나만 상담하고 약을 처방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부모님과 상의해 볼 수 없겠냐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붙잡은 선생님은 우선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 약을 처방할 테니 상담 세션을 잡자고 했다.


 "아버지께 말하기 힘들다면 어머니께라도 지금 다정씨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건 어떨지 생각해봐요." 


 나는 고갤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아주 오랜 전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쓰고 싶었던 것은 부모님의 이혼을 지켜본 내가 이혼을 한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나를 설명하려면 지나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순서가 아닌 토막 난 글들의 나열이 된 것은 울지 않고 쓸 수 있는 글부터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 안에서 정리가 되었다고는 해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눈빛, 공기는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일상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까끌까끌한 나의 세계. 완전히 떨쳐내기보다는 다루며 사는 법을 터득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한 이야기들이 내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애써 용기를 내지 않아도, 울지 않아도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치의 발자국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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