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치유농장에서 나이 들기로 했다.

제8장 흙 위의 공동체, 나이 듦의 새 모델 ①

by 조영빈

제8장 흙 위의 공동체, 나이 듦의 새 모델


암 수술에서 회복하던 시절, 가끔 손님들이 내 용인 정원을 찾곤 했다. 그들은 흙을 만지고, 함께 땀을 흘리고, 직접 수확한 채소로 간단한 식사를 나눈 후 돌아가며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 덕분에, 나도 다시 살아날 것 같아요.”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회복이 어느새 이웃의 위로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흙과 바람, 햇살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과정은 결코 나만의 기적이 아니었다. 이건 모두가 함께 경험해야 할 삶의 치유 과정이었다. 그 순간, 내 정원은 더 이상 개인의 정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의 공간이 되었다.

“이 치유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그 물음이 나를 ‘연구자’에서 ‘실천가’로, 그리고 ‘실천가’에서 ‘공동체를 짓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나의 여정은 나 혼자의 이야기를 넘어 모두의 미래를 향한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가 꿈꾸는 두 가지 핵심 개념, 즉 PCC(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과 GCC(가평 그린케어 커뮤니티)의 관계를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앞으로 나의 여정을 함께 걸어갈 독자들을 위한 작은 지도인 셈이다.

‘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PCC)’은 내가 용인의 정원에서 몸으로 길러낸 하나의 잘 다듬어진 씨앗이었다. 그 속에는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살리는 작은 우주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검증한 치유농장의 구체적 모델이었다.


하지만 한 알의 씨앗으로는 숲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같은 꿈을 꾸는 여러 개의 씨앗(PCC)을 가평의 땅 여기저기에 심기로 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이 서로 연결되어 결국 울창한 숲을 이루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가평 그린케어 커뮤니티(GCC)다. 즉, PCC가 개별 농장의 모델이라면, GCC는 그들이 함께 자라나는 네트워크이자,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가평의 미래이다. “한 알의 씨앗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여러 씨앗이 모여 이루는 숲은 생태계를 바꾸고 미래를 만든다.” 이제 우리는 그 숲을 돌보는 이야기, 곧 가평형 치유 공동체의 탄생을 시작하려 한다.


1. 나이 듦을 새롭게 정의하다: 쇠퇴에서 순환으로


‘나이듦’이란 무엇일까. 암을 진단받고 차가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버렸고 그때 ‘나이듦’은 나에게 두려움의 단어, 즉 ‘쇠퇴’와 ‘상실’을 뜻했다.

퇴직이라는 사회적 타임테이블에 따라 하나둘씩 물러서고, 몸의 기능은 예전 같지 않으며, 결국 고요한 퇴장의 시간으로 끝이 나는 것. 그것이 내가 알던 노년의 풍경이었다.

많은 이들이 진심 어린 위로로 말했다. “이제는 마음 편히 쉬어야지요.” 아마도 그것이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농장을 시작합니다. 언젠가 누워 쉬어야 할 그날이 오기 전까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서서 살고 싶습니다.”


흙 위에서 다시 배운 삶의 계절


나는 흙을 만지며 다시 배웠다.

자연은 결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봄에는 뿌리를 내리고, 여름에는 자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멈추어 숨을 고른다.

나의 삶도 그랬다. 낯선 도시에서 뿌리내리려던 봄의 시절,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던 여름의 시절, 성공과 실패 속에서 지혜를 거두던 가을의 시절, 그리고 병상에 누워 모든 것을 멈추어야 했던 겨울의 시절. 나는 그 겨울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겨울은 사라짐의 계절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위한 에너지를 땅속 깊이 저장하는 계절이었다.

그때 나는 배웠다. 나이듦이란 쇠퇴가 아니라 순환의 시간이라는 것을. 몸의 에너지가 줄어드는 대신, 삶의 지혜가 깊어지고, 관계의 온도가 더욱 따뜻해지는 시기. 노화는 약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로 다시 강해지는 시간이었다.


치유농장에서 다시 사는 노년


이제 나는 믿는다. 치유농장은 노년을 견디는 곳이 아니라, 노년을 다시 살아내는 곳이다. 흙 위에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몸이 불편해도 손끝으로 생명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외로워도 누군가와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나이듦은 더 이상 멈춤이 아니라, 삶을 다시 순환시키는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듦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사회가 정해준 시간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든 시간 속에서 나이 들기로 했다. 이 모든 여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은 결국 이것 하나였다.

“나는 치유농장에서 나이 들기로 했다.”


2. 혼자가 아닌, 서로를 잇는 다리 ― PCC 의 탄생


회복은 흙에서 시작되고, 공동체로 확장된다. 내가 흙 위에서 이룬 회복은 결코 나 혼자만의 성취가 아니었다. 전립선암 수술 이후, 낯선 몸과 마주한 채 고립된 시간을 버티던 나에게 용인의 작은 정원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유일한 창이었다. 처음에는 오직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흙과의 대화, 씨앗과의 약속, 물 주기와 관찰의 반복.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던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고 깨달았다.

“이 정원에 나 혼자 있지 않았구나.”

정원일을 도와주던 마을 어르신, 함께 풀을 베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 직접 따온 허브로 차를 끓이며 눈시울을 붉히던 이웃. 그들은 어느새 내 곁에 있었다. 내 회복은 어느새 마을의 생기를 되살리고 있었고, 마을의 따뜻함은 다시 내 몸과 마음을 살려냈다.


그때 알았다.


“치유는 이어 나간다. 결코 혼자 머물지 않는다.”


한 사람의 회복이 또 다른 이의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노년의 공간’은 외딴 요양원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열린 공동체의 집이어야 했다.


용인의 다섯 구역, 가평의 청사진이 되다


용인에서 구상한 다섯 개의 구역(Zone 0~5)은이제 가평 PCC 디자인의 기본 원리이자 삶의 지도가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구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공동체로 확장되는 여정의 지도였다.


Zone 0 – 집

가족과 가까운 동료들이 일상과 생각을 나누는 중심.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만남.교육.명상의 거점이다.


Zone 1 – 치유정원

휠체어 높이에 맞춘 상자텃밭, 향기로운 허브정원, 음식물 쓰레기가 비료로 순환되는 키홀텃밭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손끝으로 살아 있음을 되찾는다.


Zone 2 – 공유의 들판

마을 주민과 조합원들이 함께 경작하는 공동텃밭이다. 도시에서 은퇴한 이들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이웃과 한 끼를 나누며 진정한 풍요를 배운다.


Zone 3 – 배움과 실천의 장

인생2막 실천디자인스쿨(Life 2 Act Design School)을 통해 정원가꾸기, 로컬푸드, 관계맺기, 마을살이 기술을 전수한다.


Zone 4 & 5 – 침묵의 숲

산책길과 명상터, 치유음식 정원으로 이어진다. 노년의 성찰과 청년의 사유가 만나는 고요한 회복의 공간이다.


이 다섯 구역이 하나로 연결될 때, PCC는 개인의 삶이 공동체로 순환하고 확장되는 구조가 된다.


하루의 풍경, PCC에서 피어나는 공존의 장면


아침 햇살이 정원을 가득 채운다.

초기 치매를 앓는 할머니가 휠체어 높이에 맞춰 조성된 상자텃밭에서 손끝으로 흙을 어루만진다. 평생 익숙했던 손놀림으로 흙을 고르고 모종을 심으며,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을 되찾는다. 옆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흙을 만지고, 그 웃음소리에 할머니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미소가 번진다.


점심 무렵, 도시에서 은퇴한 교사가 퇴비를 뒤집는다. 경쟁과 효율 속에서 살아온 그는 이제 자연의 질서와 순환을 배우며 마음을 달랜다. 오후에 열리는 ‘인생 2막 실천디자인스쿨’에서 명예 강사로서 새로운 길을 찾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원을 가꾼다는 건 결국 사람을 돌보는 일입니다.”


저녁이 되면 공동 부엌이 분주해진다. 막 수확한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고, 매실나무 그늘 벤치에서는 어르신들이 감자를 깎는다. 젊은 부부는 커다란 솥에 밥을 지으며 서로의 하루를 묻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을에는 깊은 평화가 깃든다.


여기에는 높은 문턱도, 굳게 닫힌 울타리도 없다. 누구나 드나들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 주는 곳, 그곳이 바로 내가 꿈꾸는 치유농장이다.

이 마을의 중심에는 언제나 고향을 묵묵히 지켜 온 사람들이 있다. 젊은 시절 도시로 떠난 내가 다시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흙과 마을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농한기에도 밭을 돌보고, 어르신의 안부를 챙기며, 마을 행사를 이끌던 이웃들. 그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마을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이 농장의 핵심 주체로 서 있다.

그들은 땅과 계절을 아는 지혜로 젊은 세대를 가르치고, 은퇴한 도시의 전문가들은 재능기부로 힘을 보탠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고 삶을 나누며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된다.


이 농장은 단순히 작물을 기르는 곳이 아니라, 세대가 함께 배우고 자라는 학교이자,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성장하는 공동체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노년은 외로움의 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 퍼머컬처 커뮤니티 케어팜은 그 다리를 설계하는 ‘삶의 구조’다.

이곳에서 사람은 흙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늙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 속에서 완성되는 ‘공유된 성숙’이다. 나는 오늘도 이 흙 위에서 다짐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의 늙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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