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너, 네가 있으면 좋겠다

또렷이 쳐다보고 싶은 사람

by 초들


바로 너, 네가 있으면 좋겠다



1980.02.08.(금) 08:38 am 광주발 장흥행 광우교통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조선일보 일간지를 펴 두 눈을 고정한다. 이윽고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탁 트인 광산군을 달린다. 매우 낯익은 풍경, 오랜만에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백설의 세계를 보며, 그만 와르르 우울한 심연 속에 빠져든다. “기사님, 유치 갑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럼요.” 슬며시 웃으며 대답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치에 못 갔단다. 유치에 가려면 ‘빈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눈이 많이 내리면 여지없이 교통이 두절(杜絶)된다.


실소(失笑)를 머금을 때, 버스는 거북이걸음으로 재를 넘더니 어느덧 유치에 도착했다. 11:30 휴, 무려 2시간 52분 걸렸다. 이제 자전거를 타고 암천리로 향한다. 오늘도 진흙이 자전거 타이어에 달라붙어서 자전거를 질질 끌며 사투(死鬪)를 벌인다. 페달(pedal)에 힘주다 보니, 왼쪽 무릎에 통증이 온다. 갑자기, ‘쿵’ 자전거와 함께 빙판 위로 넘어졌다. 하필이면 왼쪽으로 넘어졌다. 왼손과 발이 통증이 더 심해져, 자전거를 겨우 끌고 갔다. 눈앞에서 承弟가 가여운 표정 지으며, “浩兄아! 수고 많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드디어 암천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청천 하늘에 날벼락같은 선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2월 11일, 월요일에 졸업식을 거행하라는 교육청 지시가 내려왔단다. 교장 선생님 왈(曰), “내일, 모레 졸업식 준비를 다 해 놔야 해.” 나는 “예”하고 짤막이 대답했다.



承弟야!

이렇게 긴 서두를 밝히는 건 이번 주 토요일에는 광주에 못 가기 때문이다. 벌써 네가 보고 싶다. 너의 두 눈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싶다. 암천리에 오며 계속 너를 생각했거든. 너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화내지 말고 들어주길 바란다. 지난번 아버지께 보낸 편지에 ‘어쩌면 네가 우리 집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구세주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정말 미안하다.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겠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인데, 사람이 어떻게 돈의 희생물이 되겠니? 너를 사랑한다. 혹여 부질없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특히, 주안에서 너와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承弟야!

나의 운명(運命)은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따뜻한, 포근한 본연의 다정다감한 내가 되고 있다. 너는 행운아인지 모른다. 한 남자의 운명을 탈바꿈시키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있으니까.

졸업, 19명의 학생을 모레 졸업시키려 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 제자들이, 헉. 풋내기 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치면서 제자 운운하니 웃긴다.

바람이 분다. 춥고 매서운 바람이...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네가 필요하다. 지긋이 가느다란 눈 크게 뜨고서 또렷이 쳐다보고 싶은 사람, 바로 너. 네가 있으면 좋겠다.


2월 16일 토요일, 광주에 가마. 바쁘고 피곤한 하루를 핑계 삼아 그만 그치겠다. 이 밤, 내 사랑 그대여! 너의 고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자겠노라. 너도 편히 자기를 바라. 내일은 주일! 내 몫까지 봉사해 주길 바란다. 안녕.

1980.02.09.(토) 浩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