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범벅된 자전거를 세척했다. 손이 시려 ‘호호’ 불어가며 애차(愛車) 자전거를 깨끗이 닦았다. 오랜만에 냄비 밥을 했다. 그만 새까맣게 태웠다. 이리저리 숟가락질하며 타지 않는 밥을 골라 먹었는데, 좀 처량했다.
교내 순찰을 하고 숙직실로 와서, 네게 편지를 쓰다가 그만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만 잠을 깼다. “김 선생, 문 좀 열어주세요.”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이 시간에 누구실까?’ 문을 열어보니, 청부 아저씨가 동네 청년 두 사람과 같이 계셨다. 잔뜩 술 취해 얼마나 문을 세게 두드렸는지 문창살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 늦은 시간에 숙직실에 왜 오셨는지?’ 대판 입씨름했지만, 취중이라 도대체 대화가 안 된다. 내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지, 인격 모독성 발언에다 졸렬한 말을 내뱉더라. 순간 우울해지고 말았다. 별 까닭 없이 현재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갑자기 들더라. 면(面) 소재지에서 12km 떨어진 산간벽지 오지 학교의 숙직실이라는 게 원망스럽더라. 더 이상 말 나누기 싫어서 침묵을 지켰더니, 제풀에 지쳐 두런두런 혼잣말하더니 그만 나가시더라. ‘내가 좀 더 이해했더라면, 씁쓸한 감정을 갖지 않았을 텐데.’라고 후회를 했다.
承弟야!
사람은 만족할 수 없을까? 고차원의 세계, 무한한 공간,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가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표상(表象)이라고 말한 철인(哲人)의 의견에 동의하며, ‘사람의 참 의지(意志)로 표상을 다스릴 수 있다’라는 결론을 맺었다. 쌩떽쥐베리는 ‘어린 왕자’에서 인간애를 강조했다. ‘너 그리고 나’는 개개의 개체에 불과하다. 개체의 개체를 연결시키는 관계사가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와’란다. 즉, 너와나 → 이렇게 해서 ‘우리’가 되는 것이다.
承弟야!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한다. 결혼은 다양한 만남을 갖게 되고, 그 만남 뒤에는 얽매임과 부대낌이 생겨 소중한 가치와 오묘함을 잊고 살아가게 될 것 같아. 미혼인 나는 내게 드리워진 열악한 환경에 몰입하다 보니, 그토록 좋아했던 문학 세계를 잊고 산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어. 그러고 보면 무소유(無所有)란 무진장한 자유(自由)를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기대하느니 보다 양보하고 버리며 살아가야겠어.
Hesse의 문학 세계도 좋아한다. 왜냐하면 현실 자체는 철저히 부패되어 있고, 내가 바라는 많은 이상과 희망을 추구할 수 없기에 방황하게 된다는 거지. 덧붙여 이런 생각도 해본다. 현실을 모두 한결같이 비관적으로만 본다면, 결국 인간은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 거야. 냉정하고 고도화된 물질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 때문에 우리들은 물질문명을 다스릴 수 있는 고도의 정신문명을 만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르네상스가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일어났던 운동이라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제2 르네상스를 일으켜서 기계, 물질문명 속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전하며 글을 맺을까 한다. 현실 세계 속에서의 빛나는 보석은 인간 본연의 감정으로 사랑하는 것, 주 예수를 위해 죽으리라는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겨울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싸늘한 북풍이 매섭게 몰아쳐야 할 계절인데 말이야. 하지만 엄연히 겨울이다. 이 계절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아가는 너와 나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