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바득 살아가는 우리
현관을 열고 나가는 순간
촉촉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는다.
사뭇 달라진 공기의 온도와
냄새와 촉촉한 습기를 느낀다.
가을이 찾아온 걸까.
유독 밤하늘은 맑고 청명해 보인다.
둥근 보름달이 잔잔하게
온 동네를 비추고 있다.
삶이란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허무하고도 덧없어 보인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연의 세계에 첫 발을 딛고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떠난다.
우리는 무얼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는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곳에 취직하고,
좋은 남자 혹은 여자를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고, 살아갈 집을 마련하고,
꿈같은 신혼생활을 즐기고,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과 투자를 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더 큰 성장을 위해
독서와 취미활동 등
다양한 자기 계발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국 신체는 노쇠해지고,
결국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는 우리의 육신은
늙고 병들고, 하나둘씩 망가지기 시작한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과 청춘은
되돌아보면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사실 우리는 서서히 죽어간다.
꽃이 폈다가 지는 과정과
어떠한 것도 다를 것이 없다.
아름다운 꽃, 귀여운 강아지,
거슬리는 모기 한 마리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별로 없다.
크게 보면, 삶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도도,
이렇다 할 거창한 의미도 없다.
세상은 인간 개개인의 삶에
가혹하리만큼 무심하다.
우리는 그러한 곳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삶의 의미라는 것은
본래 정해진 어떠한 것도 아니며,
그 누구도 정해줄 수 없는 것이다.
백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참한 허무주의에 젖어 사는 삶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
결국 삶을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스스로가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든 참인 명제이다.
그게 아니라면,
삶의 시작과 끝을 포함한
모든 과정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으며,
인간 개인이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무언가라고 한다면,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가는 것인
설명할 길이 없다.
삶이란 건 결국
본래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들에서
의미를 찾아나가는,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그런 과정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풍족한 자원으로 인해
생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는
거의 완전하게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이 권태를 극복하고,
삶의 공허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이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그 의미라는 것을
찾아나가는 방법론들을 나름대로 제시하며,
그러한 방법들이 마치 종교처럼 추앙받는 시대이다.
그만큼 우리는 삶의 의미와,
공허와 권태를 극복하는 문제들에 대해
간절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진심으로 신을 믿을 수 있다면,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선과 악을 결정해 주고,
나아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면
삶이 이토록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본주의와 르네상스는 혼란의 시작이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이 제시하는 삶의 이정표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결국 인간 스스로의 삶에 대해,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결정과 결과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우리에게 지어주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오롯이 혼자서, 스스로 찾아나가야 하며,
이는 사실 창작에 가까운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