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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Oct 30. 2022

민중 항거의 정신을 일깨운 '라 마르세예즈'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새 역사를 기록한 지중해의 항구도시

혁명 시작 전 평범한 시민들은 혁명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부당한 대우에도 항거의 방법을 모르고 그저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하던 평범한 일상을 접고 마르세유 사람들은 미래에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귀족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왕과 귀족들에게 힘없는 시민들이 함께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족들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혁명에 너도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당시 시민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사회환경을 만들어놓고 호의호식하던 귀족들에 비해 시민들은 한없이 나약했지만 평등의식을 자신의 내면에서 일깨우며 다 같이 뭉치며 항거하였다.


싸움이 안될 것 같았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귀족에 맞섰던 시민군은 부조리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참여한 항거의 자리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힘차게 불렀다. 이는 앞으로 왕이 아닌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의 정책을 결정하는 프랑스 공화정이라는 새 역사를 쓰는 기폭제가 되었다.   
 
 원래 '라 마르세예즈'는 스트라스부르의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음악적인 조회가 높았던  로제 드 릴이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서는 군인들이 잘 부르질 않아 묻혀있던 이 노래가 마르세유의 한 의대생이 어찌 이 노래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민군 자격으로 참여한 자리에서 당당하게 이 노래를 불렀고 마르세유 시민들의 가슴에 이 노래가 큰 파문을 만들었다. 그 후 마르세유에서  이 노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혁명의 노래는 마르세유 시민군이 파리로 진군하면서 힘차게 불렀고 파리 입성 시 부른 노랫소리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며 방방곡곡 퍼져나갔다.  


출처 :  Marseillaise : hymne national - Histoire

https://www2.assemblee-nationale.fr 


'라 마르세예즈' 가사를 보면 국가로 부르기에는 가사가 과격하다고 하며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도 개선 요구 의견도 있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있고 또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반테러에 항거하는 시위 등에도 이 노래는 자주 등장한다.


가사의 일부분만 봐도 조용히 잠자고 있던 시민의식을 행동으로 연결시키도록 일깨우는 마법 같은 것이 노래에 있는 것 같다.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들리는가 저 들판의
   흉폭한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1792 프랑스혁명의 초점이  마르세유는 프랑스혁명 참여를 위해 파리로 진군하였는 데 마르세유 출신의 시민 지원군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부른 노래로 파리 등에 전국적으로 이 노래가 알려졌기 때문에 군중들은  노래를 '라 마르세예즈'로 부르게 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를 목청껏 부르면서 시민들은 부르봉 왕가와 귀족의 횡포를 다 함께 되새기고 나약했던 시민군의 전열을 정비해나갔으리다. 또 전국 각처에서 모인 시민군들은 귀족들의 횡포에 대항한다는 목표로 함께하였지만 왠지 어색한 서로 간의 거리를 이 노래로 사상을 공감하며 거리를 좁혀갔을 것이다.   


시민군은 이 군가를 부르며 샹젤리제의 대로를 행진하였고 파리 시민들은 가사를 듣고 공감하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시내에 그리고 전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파리 시민들은 <마르세이유의 군가>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국가가 되었다.  


시민행동을 촉구하는 다소 과격해 보이는 가사로 금지가 되기도 하면서도 1795년에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살리에리(1750-1825)는 이 곡을 자신의 작품 <파리 미라>에 채택해서 썼으며, 1833년에는 슈만(1810-1856)이 비인에서는 금지 곡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26번 <비인의 사육제>의 주요 선율로 썼다.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의 서곡과 가곡 <두 사람의 척탄병(擲彈兵)>에도 사용했다. 그밖에도 바그너,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등이 채용하는 등 <라 마르세예즈>는 유명한 곡이 되었다.

https://youtu.be/BUbcMTPoPuk




  

출처: https://life4972.tistory.com/entry/오늘날-프랑스의-국가인-라-마르세예즈는-마르세이유의-노래라는-뜻이다 [sns 소통이 답이다:티스토리]


마르세유는 1942 11 독일에 의해 점령된 후 독일에 항거하는 주요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2 세계 대전 동안 심하게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후 도시는 더 확장되었고 프랑스 식민지와 주변국에서  이민자들이 도시 재건에 함께 참여하면서 지중해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마르세유의 관문역할을 하는 생쟝요새


마르세유에서 시민혁명의 불씨는 루이 14세가 마르세유 시민을 감시할 필요성을 느껴 마르세유에 요새를 정비하고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포구를 정비한 것부터 혁명의 불씨가 키워져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요새를 새로 건설하면서 바다로 침입하는 외부 세력을 물리치는 형태가 아닌 마르세유 시내를 향하도록 하여 마치 시민에게 포구를 겨눈 것처럼 보이도록 요새가 건설되면서 까불면 죽는다는 듯이 시민들을 겁주는 형태로 요새를 건축할 때부터 마르세유 시민들 마음에는 이미 혁명의 불씨가 자라나고 있지 않았을까.

 

마르세유를 항구에서 접근하면 도시의 상징으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생장 요새는 기원전부터 그 흔적이 보이고 있다. 마르세유에 있는 지중해 문명 박물관에는 기원전 6 세기 초로 보이는 유물들이 발굴 작업을 통해 전시되고 있는 데 생장 요새 관련해서 기원전 2 세기로 추정되는 헬레니즘 도자기 조각도 그곳에서 발굴되었다. 기원전 3 세기와 2 세기 등의 흔적도 발견되고 있는  유서 깊은 이곳 마르세유는 지중해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하는 지정학적 요건을 갖추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사라센과 그리스 해적들의 습격의 대상이 되었었다.  


요새는 기원전부터 특히 해상에서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Fort Saint-Jean이라는 현재 이름은 중세 기사단이 건물을 다시 세우며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맞은편에는  Fort Saint-Nicolas도 건설되었다. 12 세기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이 십자군 시대에 수도원과 호스피스로 이곳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루이 14 세 시대에 마르세이유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루이 14세에게 항거하려는 불안한 상황을 보이자 이곳의 반란을 차단하고 감시하기 위해 재건을 결정하고 이곳 요새를 새롭게 정비한다. 왕은 자신에게 항거하려고 하는 마르세유 사람들을 처벌하려 했고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직접 왔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1660 년 3 월 2 일 성벽의 열린 공간을 통해 마르세이유에 들어갔고 마르세유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순종해야 함을 강조했다. 루이 14세는 항구를 강화하기 위해 항구 입구에는 성 니콜라스를 항구 북쪽에는 생쟝 요새를 새롭게 다시 세웠다.  


이때 건설되면서는 랜턴 탑과 무기고도 건설하였는 데 생 니콜라스 성채는 빠르게 만들었지만 생쟝요새는 기존에 병원과 인근의 주택 일부를 철거하고 건설해야 해서 건축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요새를 크게 확장하며 지어야 해서 어부들은 성 요한 교회 근처에 있는 자신들의 집을 왕에게 팔아야 했고 이곳에 사령관을 위한 숙소도 짓고 십자군 시대에 사용했던 병원은 제방으로 덮었다.


1671 년 요새의 건설책임자인 루이스 니콜라스 데 클레르 빌이 사망함과 동시에 요새가 완공되었다. 그의 후계자 인 보우 반 (Vauban)은 1677 년 요새를 총 관리하며 생쟝 요새와 생 로랑 교회 사이 홍수 예방하기 위해 도랑을 파 삼각형으로 요새를 세웠고 현재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이 14세는 새로 요새를 건축하며 포문이 외부를 향하지 않고 마르세유 시내를 향하게 요새를 지었는 데 이런 이유 등으로 이곳이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이곳 시민들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역사적 추정들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마르세유는 기원전 그리스의 식민지로 정착민들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리스의 폴리스가 되었다. 이후 로마의 확장 시기에는 서부 지중해 전역에서 독립적인 상업 제국을 유지하며 번성해나갔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치른  2 포이니 전쟁시기에는  (기원전 218-201) 카르타고에 대항하여 로마 공화국의 편을 들어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던 마르세유는 기원전 49 로마의 마실리아 포위공격 이후 독립적인 지위를 잃었다. 이후에는 로마로 편입되어 로마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로마 도시로 번성하며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는 프로방스 카운티로 변경되기까지 전쟁과 주변국 사정으로 인해 각종 시달림이 있었지만 지중해 번성기에 최고의 해상 무역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했다.


1423년에 아라곤 왕국에 의해 이곳 도시의 위상이 잠시 축소되었지만 15세기 중반에 도시의 요새를 강화했던 성주 르네의 노력으로 도시 위상은 다시 상승했으며 16세기 동안 제노아와 함께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항구 역할을 하며 꾸준히 성장하였다.


1790 년 4 월 30 일은 특히 중요한 날로 , 마르세유의 혁명적인 군중들은 귀족들의 계속된 부조리한 모습에 항거하며 도시를 지배하는 요새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Nott-Dame de la Garde)와 항구 입구를 지키는 생 니콜라스 (Saint-Nicolas)와 생장 (Saint-Jean) 요새를 침략하였다. 시민 혁명군은 왕실이 지배하던 요새를 점령하였 데  성공하였다.


귀족들과 싸움에서 시민군들의 피해도 컸지만 결국 시민 혁명군은 도시의 상징인 요새를 점령하면서 왕의 부하에게 항복을 요구하였지만 왕실 연대 소장은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그를 죽여 그의 머리를 포크에 끼웠다는 기록이 있는 데 우리가 식사에 사용하는 그 포크를 말하는 것인지 번역본으로만은 정확히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지만 포크가 어떤 포크이건 간에 끔찍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 주체의 프랑스 공화정으로 가기까지 프랑스의 역사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이곳 요새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요새에서 마르세유 대성당과 마르세유 시내가 잘 조망된다.  


마르세유 시민 프랑스 혁명군은  1793 년, 올리언즈 공작 필리페에 가족을 포트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에 가두었다.  1793 년 5 월 27 일 올리언즈 공작이 생장 요새로 이송되면서 일부 가족들은 석방되었고 일부는 요새 감옥에서 사망했다.


역사적으로 Fort Saint-Jean 은 마르세유의 상징 역할을 해왔고 맞은편의 세인트 니콜라스와 함께 마르세이유의 현대를 대표하는 Mucem (유럽과 지중해 문명 박물관)와 이어지며 마르세유에서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유산 중 하나이다.  


기원전부터 로마시대까지 지중해의 중심 요새로 자리 잡아왔던 생쟝 요새는 12세기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성 요한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루이 14시에 항거한 이후에는 새롭게 다시 건설되었다. 프랑스혁명 시기에는 시민군 거점이 되었고  프랑스의 혁명기에도  혁명가를 대중에 알리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함께하며  오늘날 마르세유의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대와 중세 현대로 이어지며 마르세유 과거의 상징인 생쟝요새는 마르세유의 현대를 상징하는 Mucem이 건설되면서 새롭게 건축된 다리로 둘 사이가 이어졌다. 그 모습은 요새가 자신들의 오랜 과거 역사에서  축적된 지식을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현대로 그 축적된 자산 지식을 건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 한 명의 시민들은 나약하였지만 함께한 그들은 부조리한 권력 앞에 위축되지 않았고 힘을 모아 <라 마르세이즈>를 부르며 진군하였던 이들의 정신이 앞으로 무엇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현대로 이어지며 또 어떤 시대의 부조리함에 맞서며 당당하게 일어설지 기대가 된다.


부조리한 권력의 힘을 보여주며 겁주듯이 시민들에게 요새의 포구를 향하게 했던 거대한 힘 앞에서 마르세유 시민 혁명군은 겁먹지 않고 함께 당당하게 맞섰다. 마르세유여!! 그 항거의 정신을 계속 살려 앞으로도 현대의 부조리함에서 맞서 싸워나가라. 라 마르세예즈.  라 마르세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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