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뒤낭의 인권에 대한 신념이 새겨진 도시 – 제네바
'전투의 범위 밖에 있는 자와 전투행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구는 제네바 협약의 일부 내용인데 제네바 협약을 볼 때면 세상에서 제가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권리들에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권리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고마움은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권의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는 인권에 관한 권리들을 자연스럽게 누리고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긴 해도 상당 부분 인권은 법으로 보호받으며 우리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 인권이 누군가의 수고와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실 누군가가 이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일생을 바쳐가며 피와 땀이 맺힌 노력으로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어렵게 이룬 결과물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일상에서 제가 누리는 권리들을 위해 노력해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네바협약도 힘들게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인권의 권리인데, 최초의 국제 인권협약이 앙리 뒤낭이라는 인물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국제협약인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 분의 노고에 머리 숙이게 되었습니다. 뒤낭은 제네바 출신인데 그는 전쟁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또 전쟁터에서 전쟁 포로들의 힘든 상황을 보고 난 이후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인간의 힘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앙리 뒤낭의 노력으로 힘들게 체결된 제네바 협약은 최초의 인도주의적 국제협약입니다. 이 협약의 일등 공신이 앙리 뒤낭인데 그는 제네바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았습니다. 앙리 뒤낭(J.H. Dunant, 1828~1910)은 자신이 준비하는 사업을 전쟁 중인 나폴레옹에게 설명하기 위해 우연히 솔페리노에 갔다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벌이는 솔페리노 전투의 비참한 광경을 직접 보게 됩니다.
뒤낭은 전쟁 현장의 비참한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한 후 그곳에서 벌어지던 광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전쟁터에 국제 구호단체의 설치와 그 활동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의 체결을 전 세계에 촉구하고 적십자사를 창설하는 등 자신의 평생을 바쳐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한 인물입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적십자사 창설 이후 말년에는 가난으로 고생하였고 그런 중에도 노벨평화상으로 받은 상금조차도 아껴 그의 사후에 남은 재산을 기부하며 이 세상을 떠날 만큼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병·조난자·포로·일반 주민 등이 제네바 국제협약으로 직접적인 전쟁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인류에게 '제네바 협약'이라는 선물을 세상에 주고 떠났는 데 그가 만들어낸 제네바 협약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인권에 대한 토대를 마련해준 것 최초인 조약이었습니다.
제네바협약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제네바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었는데요. 루소는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이며, 여기에서 개인은 인간으로서가 아니고 시민으로서도 아니며 단지 병사로서 우연히 적이 되는 것"이며 또한 "전쟁의 목적은 적국을 격파하는 데 있으므로 그 방위자가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이를 살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순간 적 또는 적의 도구의 기능을 버리고 다시 단순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므로 이제 그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라고 '사회계약론'에서 말하였습니다.
사회계약론은 제네바협약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니 제네바 출신의 루소가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뒤이어서 뒤낭이 국제협약이라는 성과를 만들고 직접 실천하는 기관으로 적십자까지 만들어냈으니 제네바는 명실상부 국제기구들이 앞다투어 자리 잡고 싶어 하는 국제기구 도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곳이라 여겨집니다.
이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제네바는 인류애에 대한 풍성한 결실을 이룬 것에 대한 도시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한데요. 앙리 뒤낭은 이런 공로가 인정돼 제1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 데 뒤낭의 사상적 기반은 사회계약론이 뒷받침되었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그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은 그의 부모님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부모님의 면면을 살펴보면 제네바 시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와 칼뱅 개신교 신도였던 어머니에게 검소와 근면함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뒤낭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부모님을 보고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뒤낭은 시의회 의원으로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가난하고 어린 범죄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소년원에서 봉사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고 또 소외된 지역의 사람들은 돕는 일을 실천하시는 어머니를 도우며 실제로 실천하는 인본주의 교육을 그는 직접 받고 자랐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는 부모님 옆에서 직접 도우며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자랐으니 이런 부모님에게 자란 그가 최초의 인본주의적 국제협약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노력한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이나 유물로 평가받는 것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위대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사상적 기반과 정신은 한 명의 어느 똑똑한 사람이나 혹은 한 세대에서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닌 한 세대를 통해 토대가 마련이 되면, 다음 세대에서 좀 더 개선되고 이후 다음 세대가 받아 좀 더 보완되는 긴 과정을 거치고 되풀이하며 좀 더 나아지면서 완성되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루소가 인권에 대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뒤를 이어서 뒤낭이 그 사상을 실천하고 실천 의지와 훌륭한 정신적 토대를 뒤낭의 부모가 정서적으로 제공하고, 뒤낭이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당시 그를 지지해주던 사회지도층과 구성원이 존재한 것처럼 말이죠.
또한 뒤낭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다른 사건으로는 그가 전쟁터에서 직접 목격한 선한 행위였습니다. 사실 선한 영향력과 악한 영향력은 단순히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데 뒤낭은 실제로 그가 직접 본 전투에서 쓰러진 부상자를 치료하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는 형제다’를 외치며 타국의 부상자까지도 성심껏 돌보아준 카스틸리오네 마을 여성들의 선한 행동을 본 것이 미래 인권협약에 대한 실천 방법론에 도움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국의 병사가 뒤엉켜있으면 아군을 가려내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그동안에는 전쟁통에서 우리 편이다 싶으면 치료해주고 남의 편이면 죽게 놔두는 식으로 부상병을 처리되고 있었을 텐데요. 그가 본 카스틸리오네 여인들은 전쟁터에서 발생한 부상병을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성심껏 치료해주었습니다.
전쟁터 현장에서 있었던 선한 행동이 향후 인권협약에서 전쟁터에서 인권을 유린하지 말자식의 공허한 방법론이 아닌 구체적으로 세분화된 전쟁 부상자와 포로에 대한 처우 방법이 나올 수 있게 한 것이었죠. 또한 전쟁터에서는 중립적인 기관이 부상병 치료에 나서야 하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일반시민들에 대한 처우 등에 대한 방법론들도 나올 수 있었고요.
전쟁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전쟁 속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중립적으로 전쟁 부상자 및 전쟁의 극한 상황을 도와줄 수 있도록, 그래서 전쟁터에서도 부상자와 민간인 등이 좀 더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중립적인 단체가 필요하다는 그의 설득에 많은 의료인, 기부자, 및 사회 각계의 진심 어린 성원이 있었기에 제네바협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과 특히 사회지도층이 그를 성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을 도울 수 있는 적십자가 이곳 제네바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전쟁터 카스틸리오네 마을에서 행해진 선한 행위가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만의 행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파동을 거쳐 뒤낭과 같은 외부인에게도 선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 차별 없는 선한 행위는 또다시 지구에서 사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인권협약이라는 결과물로 태어났으니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은 다 함께 인류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의 나타난 과정을 자세히 그 루트를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오늘 누군가 행한 하나의 선한 행동은 또 어떤 파동을 거쳐 어떤 위대한 결과물로 이어질지 기대되지 않나요? 나 자신도 그런 선한 파동을 만드는 게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전쟁터에서 우리 편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상대편은 그들의 어머니 혹은 그들의 연인과 어린 아들 딸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귀중한 사람들일 텐데요. 서로 싸워야 하는 그들이 만약 전쟁터에서 서로 만나지만 않았다면, 그들이 만약 어느 멋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한잔의 맥주를 서로 나누며 친구가 될 수 도 있었을 법한 사람들인데 전쟁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순 없을까요.
카스틸리오네 마을 사람들은 적국의 군인들 조차도 정성으로 치료해주면서 전쟁터로 나가 있는 바로 자신들의 가족도 떠올렸을 테지요. 그들의 아들과 남편도 자신들이 치료해주는 적국의 병사들처럼 저렇게 비참하게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 만약 자신의 가족도 적진에서 쓰러져 있는 부상병인 상황이면 힘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손길이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정신으로 쳐다보기에는 힘든 전쟁터를 겪어보고 그곳에 보다 인간적인 손길이 간절하다고 느낀 후 전쟁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쳤던 뒤낭, 그런 사람이 이곳 제네바에 있었기에 그들의 정신적 밑거름이 전쟁 이후에 이곳 제네바가 국제기구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네바 협약 후 세계 1차 2차 대전을 치르며 전쟁터에서는 제네바 협약을 충실히 따라서만 전쟁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인본주의 협약을 따르지 않은 나라를 우리는 비난할 수 있고 점차 인권이 개선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으니 인류는 선한 방향으로 한걸음 더 전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뒤낭 같은 사람들이 국제사회에서 계속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또한 동시대 및 다음 세대들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카스틸리오네 마을에서 벌어졌던 선한 행위가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그런 선한 행위의 파동들이 지구촌에서 점점 더 새로운 더 큰 파동을 만들어 인류사에 기여할 수 있는 선한 결과물 배출로 이어지기를 꿈꿔봅니다.
선한 행위가 선한 파동들을 만드는 것과 달리 또한 지금 세대의 잘못은 지금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음 세대에게는 또 다른 아픔으로 남는다는 것을 우린 역사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전쟁터에서 아드레날린이 최고조로 분비되는 그 아수라장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씻지 못할 과오들은 참가한 군인들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그 트라우마를 무겁게 짊어지고 죽는 날까지 살아야 합니다.
승자의 저주처럼 전쟁에서는 이겨도 승자의 고통과 진통 역시 클 것인데 역사는 왜 잘못된 사례들을 다시 반복하면 안 되는 데 잘못된 사례들까지도 왜 계속 반복하고 있을까요. 인간이 과거 만들어낸 인류의 아픈 상처의 역사들을 계속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Humanity)는 어디로 갔는가?”
이는 뒤낭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데 이 사회가 점차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지막 질문이었겠지요. 뒤낭의 질문에 이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가?라고 묻고 싶네요.
현대로 올수록 전쟁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상처지만 전쟁 후의 지구상의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고 점점 더 그 상처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과할 것입니다. 국제사회는 전쟁을 가장 마지막의 선택지로 남겨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대의 전쟁은 다음 세대까지도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라 생각하는 데 앞으로의 국제사회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이제 국제 사회는 자기 나라의 리더만이 아닌 주변국의 리더까지 살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만약 현대에서 히틀러와 같은 위정자가 다시 한번 더 나온다면 국제 사회가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도 끔찍하지 않은가요? 최신 무기와 살상 무기로 치러질 현대전으로 인류는 다른 나라의 위정자들로 인하여 전 지구촌이 공동 멸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또 국제사회는 정말 어느 길로 가고 있나요?
도시나 제국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 시기에는 항상 사회의 등불 같은 존경받는 리더가 앞에 서있었고 사회 지식인층은 그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해주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서 호사롭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가장 힘든 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움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지친 고단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들기 전 짬을 내서 책을 읽고 자신이 전쟁터어서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나태해질까 두려워하며 다태 직접 명상록을 썼습니다.
로마 사회는 황제가 가장 힘든 전쟁터에서 나가 싸우고 있으니 다른 권력층이 그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으려고 할 법도 하였지만 지식인층은 그를 지지해주고 그래서 로마는 더 뻣어나갈 수 있었겠죠. 가장 힘든 장소인 다시 치열한 전쟁터에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명상록을 써가며 가장 전쟁에서 앞장서 나갔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노고가 있었고 그를 지지한 시민과 사회가 있었기에 이후의 로마가 한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느덧 승리에 익숙해지고 이제는 최전선에서 가장 힘든 곳에 지도자가 거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점점 물러서서 나와있고 그동안 쌓아 둔 풍성한 결실에 취하고 향락이 극에 달하는 순간 로마의 국운은 다하고 쓰러질 일만 남게 된 것이었고요. 역사적인 사례에 비춰볼 때 우리들도 한 나라와 사회가 앞으로 어찌 될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그를 지지하고 있는 지도층의 모습을 한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사회가 지속될 사회인지 국운이 다한 사회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마 황제 중에 5 현재 중 마지막 인물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가장 좋아하는 데 그는 황제이면서 여러 해를 계속 전쟁터에서 보내며 자신이 나태해질 것을 스스로 경계하며 항상 자신의 생각이 깨어있도록 스스로 노력하기 위해 명상집을 남긴 황제입니다. 그는 금욕과 절제로 대변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하였기에 그의 인상적인 리더십과 치열한 자기 고민이 우리 시대에 참 보기 힘든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황제는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닌 권력을 버린 자리이고 물리적으로도 가장 힘든 자리라고 그는 생각하였기에 전쟁터라는 로마 시민에게 있어 가장 힘든 장소에 거하며 시민장병들과 함께한 그의 리더십이 현대의 국제사회에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비슷하게 뛰어난 리더십을 보인 인물로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도 역시 아우렐리우스처럼 전쟁터에서 가장 앞서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제일 선봉에 서는 리더십을 보여주며 존경을 받았었죠.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니발과 아우렐리우스가 다른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남다른 리더십과 절제와 인내와 같은 뛰어난 도덕적 성품과 상하 구별과 차별을 두지 않으려 한 그들의 높은 인격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데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시민들과 사회지도층의 지지와 참여가 큰 힘이 되어 로마가 뻣어나갈 수 있었지만 카르타고의 한니발의 경우는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사회지도층이 돈이면 다 되는 데 전쟁터에 나가려 하지 않고 해외용병을 쓰기를 주장하고 힘든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 제일 큰 차이점으로 보입니다.
카르타고는 부자였던 카르타고 시민들의 참여 없이 한니발 혼자서 전쟁터에서 해외용 병들을 데리고 뛰는 형국이었으니 스스로 주권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한 로마 귀족과 로마 시민이 주축인 로마 군대와는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니발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해외용병들을 통합하고 자국의 군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싸우게 만든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 사회 구성원들은 해상무역으로 발전된 나라로 돈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나 봅니다. 한니발과는 달리 사회 구성원들은 힘든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래서 전쟁터에도 안 나가려고 했습니다. 전쟁도 돈으로 다 해결 가능하다며 지면 전쟁배상금을 물어주면 되는 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죠.
나라의 패망이 달린 문제에서도 사회문제의식이 없었던 카르타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전쟁은 마지막 카르타고가 멸망한 마지막 전쟁이었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때에야 정신 차리고 머리카락까지 잘라 화살실로 사용하고 난리를 쳤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시민들의 참여였고 부유한 시민들은 기금 잘 먹고 잘 사는 데 뭐가 문제냐는 문제의식 없는 사회의 최후가 어떤지 카르타고가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카르타고는 사실 얘기할 것이 너무 많아 길어지니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뛰어난 리더와 그들을 향한 사회의 지지와 참여의 중요성만 얘기하겠습니다. 사회지도층의 지지와 사회참여의 중요성에서 다시 뒤낭으로 돌아오기 전에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 얘기를 조금 더 얘기해 보려 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많은 글 중 저에게 이 글이 특히 인상적인데요. 그 이유는 그가 180년에 죽었으니 그의 사후 약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마제국 멸망과 루이 16세의 부르봉 왕조 몰락 등 수세기 동안 많은 왕조와 제국이 멸망하였는 데 제국의 지도자들은 나라가 멸망하기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보았다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제국의 몰락 전에는 거의 지도층의 부패와 향락이 도를 넘는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에 몰락하기 전에 그들이 명상록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자칫 죽을 수 있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그가 깨달은 것을 기록한 진정성 있는 글들이었기에 황제였던 그가 전쟁터에서 기록한 명상록을 2천 년간 몰락해갔던 제국의 지도층들이 보고 진작 마음에 새기고 행동에 옮겼더라면 세계의 역사도 지금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뒤낭의 전 생애를 바쳐 진행한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과 그를 도운 사회의 정의로운 손길들이 제네바가 단순히 정밀시계산업의 도시로만 그치지 않고 전 세계의 국제기구와 국제조직을 이 도시에 위치시키게 하여 국제기구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인권수호에 대한 한 사람의 정의로운 리더십과 희생 그리고 그를 지지해주었던 사회지도층의 성원과 시민들의 지지는 제네바의 정체성을 국제기구들이 위치한 국제기구 도시로 변모시켰습니다. 뒤낭의 사후 제네바는 국제기구들이 즐비한 국제기구들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으니까요.
제네바를 바라보며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이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리더는 아우렐리우스처럼 가장 힘든 고난의 자리에서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앞으로 인류가 서로 도와 멸망하지 않고 지구촌에서 공생하고 더 발전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의 나만을 바라보기보다는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도시의 역사를 보면 과거에는 크게 별 볼 일 없었지만 미래에는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발전되었던 도시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도 좀 더 좋은 세상을 전해 준 사회의 역사들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발전하는 도시의 역사에 반드시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발전하는 도시들을 보면 그곳에는 지금 세대가 진행하는 노력들이 당장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조금 손해 보는 결과를 줄지라도 다음 세대가 좀 더 인간적인 세계에게 살도록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서로 조금씩 참고 다음 세대들에 도움이 되도록 그 사회의 미래 가치를 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가려고 노력한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들과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들이 도시와 사회를 발전으로 이끈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만약 당시 뒤낭이 진행하는 인권협약과 적십자 설립에 대한 어젠다를 사회가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바쁘고 힘든데 지금 무슨 인류애가 중요하냐는 식으로 사회적 기류가 부정적이었다면 인권 같은 중요한 국제협약은 시작되지도 못했을 터이니 지식인과 리더계층 및 사회 권력층의 의식이 깨어있어야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들이 도출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제네바는 사실 유럽의 관광도시 관점으로 보면 우선순위가 높은 곳은 아닙니다. 저 역시 처음에 스위스 제네바에 지낼 때는 스위스의 청정자연환경 지역과 멋진 풍경에 먼저 관심이 갔었는 데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스위스가 가진 멋진 풍경보다도 이 도시가 가진 정신과 그들의 풍습에 더 정이 갑니다. 불편한 점도 있긴하지만요.
사실 관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네바는 크게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샤모니와 알프스 쪽으로 빠져나가기 바쁜 상황이다 보니 스위스 전체가 알프스 자연을 제외하면 도시 자체는 방문할 매력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쇼핑이나 식비 등이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물가가 비싸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유럽을 방문할 때에는 스위스의 자연풍경만 보기보다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스위스 도시만의 감성도 마음에 담아 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