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강원도 영월의 여름날.
우리 집은 남서향이라 하루 해가 질 때까지 거실에 햇살이 쨍쨍하게 들어온다.
해가 진 후에도 뜨거운 햇살의 온도가 그대로 남아있어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더운 여름을 보낸다.
유독 더웠던 여름이라 엄마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무사히 여름을 난 것 같아 다행이다.
치즈 까미도 자신들만의 방법대로 그늘지고 시원한 곳을 찾아 무더운 날들을 잘 버텨줘서 고맙다.
입추매직으로 더위도 한 풀 꺾이는 듯하더니 어젯밤부터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덥다 덥다 하다 보니 이제 가을이 오는구나 싶다.
여름철 집집마다 텃밭에 있는 상추, 호박, 가지, 여러 야채들은 먹는 속도보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뒷집아줌마는 애호박이 자고 나면 커있다고 가져다주시고, 엄마는 가지가 많이 달렸다고 뒷집에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신다.
우리 집에도 다른 집에도 남아도는 게 호박이고 가지인데 굳이 굳이 같이 먹고 나눠먹으며 여름을 보내는 시골 풍경, 시골 인심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덕분에 앞집 아줌마가 주신 밭에서 갓 딴 옥수수를 껍질 벗기자마자 바로 쪄서 더 야들야들한 옥수수와 작은집 포슬포슬 감자를 맘껏 먹었던 여름이었다.
엄마는 경로당에서 말복이라고 다 같이 송어회를 먹으러 간다고 하셨다.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고민하다 아무래도 딸의 선택에 맡기기로 한 듯 옷을 골라달라고 하신다.
맛있게 드셔라 인사드리고 출근했는데...
퇴근한 내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냉장고로 돌진하시더니 커다란 흰색 비닐봉지를 꺼내시며
"글쎄, 나만 먹기 미안하잖아. 삼촌이랑 딸 먹으라고 포장해 왔다!" 하신다.
나는 새삼 놀랐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손수 포장해 온 송어회는 너무 감격스러웠다.
엄마 마음에 보답하듯 맥주를 안 먹을 수가 없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촌과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마음에 걸리면 말은 은근하게, 행동은 확실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게 나는 엄마를 똑 닮았다.
에어컨을 틀어도 더웠던 어느 휴일.
엄마는 "나는 원래 앉아 있는 거 좋아하고, 누워 있는 거 좋아한다." 이러시면서 소파에 누우셨다.
순간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집에 가만히 계시라고 해도 하루 종일 움직이면서 하다못해 텃밭에 풀이라도 뽑으셨던 부지런한 엄마가 사실은 앉는 걸, 누워 있는 걸 좋아하셨다니!
그런 말을 하시는 게 신기하면서 그냥 나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걸 닮았다고?!
엄마도 나도 부지런하게 종종거리는 건 아마도 얼른 할 일을 끝내 놓고서 제일 좋아하는 거 빨리하려고 그런 것 같다.
또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자화자찬을 잘하신다.
"엄마는 할머닌데 피부가 아직도 왜 이렇게 좋아?! “하면서 쓰다듬어 드렸다.
“내가 살성이 좋아서 크림 한 번 안 발라도 피부가 이렇게 매끈매끈하고 좋아!
평생 농사일을 했는데도 손 봐봐. 부드럽지. “ 하시면서 자랑을 하신다.
얼마 전에 친한 동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 자랑을 하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까 ”나 엄마 닮아서 아무렇지 않게 자화자찬 잘하네?!”
엄마와 가까이 살면서 알게 된 것들.
무지외반증 발가락, 부드러운 피부결, 옷 좋아하는 것 말고도
남한테 싫은 소리 잘 못하고 참아내는 마음.
같은 말도 듣기 좋게 예쁘게 말하는 말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챙겨주는 배려.
여리고 고운 심성과 사랑 표현 방식.
하루 두 끼 이상 밥을 먹으면 물려하는 식성까지.
여름이 지나가는 무렵,
가을 풀벌레 소리를 기다리며...
나는 아빠를 닮은 줄 알았는데 엄마를 많이 닮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