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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큰딸은 다리두쪽이 다 부러졌고 막내딸은 자꾸아파

by 두움큼

강원도 애순이와 관식이었던 엄마 아빠는 큰딸을 낳고, 24년 후 쉰둥이 막내딸 나를 낳았다.

스물네 살 차이가 나는 큰딸과 막내딸, 이 둘은 자매들 중에서도 유독 잘 맞았고 친했다.

내가 언니가 살고 있는 제주로 가서 대학을 다닌 때부터 우리는 더욱 각별해졌다.


언니가 엄마에게

"엄마! 엄마가 나한테 제일 잘한 일은 막둥이 낳아준 거야. 그걸로 엄마는 나한테 해줄 거 다해줬어!"

라고 말했다.(우리 언니지만 참 사람을 심쿵하게 한다.)


언니가 마흔이 된 나를 부르는 애칭은 아직도 애기.

부모님과 살았던 시간보다 언니와 함께 산 세월이 더 길기도 할뿐더러 언니를 많이 좋아하고 의지해서 어쩔 땐 언니보다 그냥 엄마 같았다.

우리는 결이 맞았고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도 닮았다. 순수한 것처럼 보여도 악착같은 근성도 닮았다.


언니와 나는 소울메이트. 숨소리만 들어도 심정이 어떤지 느낄 수 있는 사이, 둘이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사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난 없듯 우리 가족은 많은 고비고비가 있었다.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고 예고 없이 들이닥칠 때마다 장녀인 언니가 집안을 돌봤다.

언니가 운영하던 가게가 초반에 아주 어려울 때부터 월 매출 일억이 넘도록 키워 오면서 우리는 전우애까지 생겼다. 우리가 쌓아 온 서로에 대한 믿음과 끈끈한 전우애로 그 간 힘든 일들도 마음 합쳐 이겨냈다.


작년, 우리는 엄마에게로 왔다. 엄마심장이 위험하다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버리면 그만인 건데 엄마를 혼자 두다가 큰일이 나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

큰딸의 막중한 책임감과 우리가 함께하면 그곳이 제주도든 강원도든 어떠하겠냐는 자신으로, 엄마를 지키자고 큰딸과 막내딸은 용감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제주에서의 안락과 편안은 얼마든지 보류해 놓고라도,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엄마를 모시자고 극진한 효심의 언니가 결심한 것이다.


엄마와 일 년을 보내고 다음 해 1월이 되자마자 마당에 쌓인 눈을 쓸다가 언니가 넘어졌다.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했는데 그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겨우겨우 수술과 재활을 하면서 육개월이 지났는데, 그래서 다 회복하면 여행도 많이 다니자고 약속했었는데,

엄마 집으로 온 언니는 마당 텃밭에 핀 꽃을 보겠다고 나갔다가 또 넘어졌다.

이번엔 반대쪽 고관절이 부러졌다. 한 번 다리가 부러져 봤다고 언니는 부러졌다는 걸 바로 알았다.

그날 밤, 우리는 또 병원으로 갔고 나는 울고불고 속이 상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왼쪽과 오른쪽 다 고관절이 부러진 언니. 아니 굿이라도 한번 해야 하나?

어떻게 넘어졌다 하면 골절인 건지. 그것도 집 앞마당에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엄마에게는 걱정하실까 봐 당연히 비밀로 하고,

겉으로는 걱정해 주지만 저 집에 우환이 뭐 저렇게 끼었냐고 흉이라도 볼까 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언니는 평소 활동적이고 운동도 많이 해서 근수저에 골다공증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넘어진다 해도 저렇게 쉽게 부러질 일이 아니었다.

내 두 다리가 부러졌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그 일이 우리 언니에게 일어났다.


언니 일로 내가 너무 충격과 절망을 해서였을까.

내 꿈도 미뤄놓고 시골로 와서 엄마, 삼촌과 사는 지금이 나에게 벅차서일까.

나는 난생처음 이석증 생겨서 많이 고생했다. 며칠을 회사에 못 나가고 들어 누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신경성 방광염이 생겨 지금까지도 안 낫고 있다.


제주에는 넋들임이라는 게 있는데 놀라거나 정신이 나간 것처럼 충격을 받았을 때 집 나간 넋을 다시 들여오는 의식이 있다. 넋이 나간 것처럼 철두철미했던 내가 비실비실 자꾸 아프고 영 흐릿해지는 게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넋들임이라도 해봐야 될 것은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 딸들은 엄마가 속상해하고 걱정할까 봐 안 좋은 이야기는 엄마에게 하지 않는다.

근데 엄마! 사실 큰 딸은 다리 두쪽이 다 부러졌고, 막내딸을 자꾸 아파.

호기롭게 엄마에게로 왔건만... 강원도와 우리가 안 맞을까? 우리 집터와 안 맞는 걸까?

이쯤 되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엄마는 경로당에 가서 친구할머니들과 잘 지내시고 삼촌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잘 사는데...

불타는 정의감에 너무 많은 것들을 감내하면서까지 엄마한테 온 건 아닌가 하는 살짝의 아쉬움과

만약에 우리가 제주도에 있었다면 이런 일들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이제는 무서워서 언니한테 엄마집에 오라는 말도 못 하겠는데...

우리 계속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는 거야?

엄마한테 잘 온 거 맞지...?




그래도, 그럼에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엄마 큰딸과 막내딸은 이런 위기쯤은 눈감고도 이겨내고,

엄마에게 오기로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무너진 마음을 다잡고 안정을 찾을 수 있으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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