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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만송이 Sep 21. 2023

가족의 흥망사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 마민지>






가족의 흥망사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흥망사 이야기일까?

다큐멘터리 소재에 맞게 부동산에 얽힌 가족사의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슬펐다.

부동산 망령을 따라다니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K-장녀는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으며 글을 썼을까.


부라는 것은 일부에게 오는 것이다 보니 부를 이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부터 직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도 세습이지만 가난도 세습이다. 

가난을 이겨내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치열하다.


그 치열했던 이야기를 우리나라 부동산과 엮어서 이야기 한 이 책은

참신했고 공감했으며 다행이었다.






저자 마민지는 영화감독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결국 학업을 이어갔고 알바몬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졸업한 영화과에서 그녀는 전공을 살려 자신의 가족에 대한 흥망사를 <버블 패밀리>라는 제목으로 영화제작을 하고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받는다. 독립영화 제작사인 쌍마픽쳐스를 운영 중이다. 





가족의 흥망사




그녀의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고 쾌적했다. 강남의 46평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녀의 가족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렸다. 아빠는 든든한 가장이었고 엄마는 현명한 아내였다. 엄마는 아파트의 모임의 주축이었고 아빠는 골프 모임의 주축이었다. 집에는 다양한 식물을 키웠고 커다란 수족관이 있었으며 한주에 한 번은 멋진 곳에서 외식을 했다. 파출부 아줌마도 있었고 지금은 피자 한판에 6만 원이 넘는다는 피자힐이라는 곳에서 피자를 먹고 백화점을 갔으며 심심하면 롯데월드를 갔다. 콘도회원권을 가지고 있었고 겨울에는 스키장을 가기도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 아파트 테두리 안이었으며 그 안은 쾌적하고 안락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중산층의 삶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IMF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어느 순간 46평의 집은 팔렸고 아파트 단지에서 작은 평수로 전전하다 결국 아파트 단지 밖으로 밀려난 날 그녀는 당황했다. 부모님은 이상해졌고 가난을 숨기고 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등록금 고지서를 받은 날 대학은 아무나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가스와 전기가 끊기는 날이 연속이었던 어느 날 그녀는 집을 나온다. 


알바몬이라는 별명답게 그녀는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 

가난을 증명하는 일은 더 이상 창피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보모님들과 많이 멀어졌다. 엄마와는 연락을 했지만 아빠와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가부장은 그녀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가끔 뒤져보는 화장대 서랍과 날아오는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항상 궁금했었다. 그러다 과제로 시작한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부모님에게 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 가족의 흥망사가 부동산의 버블과 이어져 있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는 이것을 <버블 패밀리>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기 전 엄마와 함께 침대에 누어 바라본 보름달은
평소보다 훨씬 밝아 보였고,
달빛이 비치는 집 안 풍경은 낯설었다. 그
날은 우리 집이 망한 날이었다.



부동산과 가족 그 지독한 끈


저자는 아빠가 건축사업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아빠가 '집장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울산공장에서 3교대로 근무하는 동안 엄마는 그 당시 이리저리 빌린 100만 원으로 아파트를 사고팔아 4년 만에 800만 원을 만들어 냈다. 그 당시 울산은 공업도시가 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며 집은 한정되어 있었다. 집은 돈 버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큰 이모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한 그들은 큰 이모의 도움으로 집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땅을 사서 2층짜리 연립주택을 지어 월세를 받거나 파는 형식으로 그들은 돈을 끌어모았다. 그 당시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다. 1970년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구수를 감당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 맞춰 아빠는 집을 지었고 엄마는 인테리어를 맡았다. 엄마의 참신한 인테리어는 다른 사람들이 지은 집보다 더 인기가 많았고 월세를 받던 덕에 현금은 마르지 않았다. 


1970년대 성북지구


마르지 않을 우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사업은 IMF 때 망하게 된다. 잘 못된 한방의 투자로 치솟아 오르는 금리에 맞춰 치솟는 이자를 해결하지 못해 결국 아파트를 팔았고 한번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 사업은 가속도까지 붙어서 빠른 시간 내에 망했다. 전기와 가스가 끊겼고 집에는 빨간 차압 딱지가 붙었다. 꿈만 좇는 아빠를 뒤로하고 엄마는 다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저자의 용돈을 쥐여주는 것은 언제나 엄마였다. 엄마는 부동산을 파는 텔레마케터를 했다. 결국 엄마에게 남은 것은 빚과 땅밖에 없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성북구와 송파구를 벗어나지 않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취재를 하는 동안 저자는 부모님들이 이 지역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타지에서 올라온 그들의 제2의 고향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부모님들이 지었던 건물도 찾아가 보고 그때를 생각하며 홍조를 띠던 엄마의 모습을 본 저자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번 황금알을 접했던 그녀의 부모님은 결국 그 황금알을 포기하지 못했다. 다른 일을 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70살이 된 지금도 땅을 쫓아다니고 있다. 





땅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불패 신화'를 믿었다. 
퇴직금은 사라지고, 권리금은 날아갔지만, 
내 명의의 땅은 계속 남아 언젠가는 가격이 오를 것이었다. 
그것이 땅의 순리였다.


나의 이야기(우리 가족의 흥망사)



어디에서 읽었는지 '아무 문제가 없는 가족은 없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화목하고 단란하며 아무런 문제 없이 곱게 지나가는 가족사를 지닌 집들은 희귀하다. 



당장 우리 가족만 해도 아빠가 사기를 당해 집에 차압 딱지가 붙었고 결국 그 집은 경매로 넘어갔었다. 그러고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엄마는 산등성이 어디에 있는 빌라촌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자동차를 30년을 근무했고 엄마는 타파웨어 판매왕과 더불어 백화점에서 옷 매장을 했지만 그때 한 번의 사기는 우리 집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엄마는 일을 한다. 나보다 더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한다. 



아빠는 결국 울산에서 남양주로 옮겨서 근무를 했다. 그때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쓰다 보니 평판이 나빠져서 근무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낸 아빠에게 온 것은 공황장애였다. 덕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울산에 내려왔다. 10년 넘게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적응하며 잘 지내고 있다.


그 덕분에 나도 20살 시작과 동시에 계속 돈을 벌었다. 장학금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대학원도 공짜로 갈 수 있다고 해서 다녔다. 안 그랬으면 근처에도 안 갔을 거다. 다행히 엄마와 아빠는 빚을 다 청산했다. 우리 엄마는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데 비트코인을 나보다 먼저 접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발굴사업에. 그 당시 들었을 때는 정말 사기 같았는데 그게 그렇게 핫할 줄이야. 아무튼 생활력 강한 엄마 덕에 우리 집은 다시 정상 궤도에 올라왔다. 지금은 늙어가는 엄마를 보면 이제 그만 일하라고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어서 조금 슬프다.


나의 이혼 권유에 '엄마가 아빠를 많이 사랑해'라고 말한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이혼을 종용하지 못했다. 아빠는 엄마에게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자식에게는 좋은 아빠였기도 해서 가끔 미워하기는 했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손주보다 딸이라며 항상 내 편을 든다. 그렇게 지금은 어느 정도 화목의 선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고,
사회구조는 이미 달라질 대로 달라졌다.
나는 다만 일흔이 넘은 엄마와 아빠가
더 이상 무언가 만회하겠다며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부를 향해 뛰어든 부동산이 아닌 그저 조금이라도 안락한 생활을 위한 부동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천장에 피어난 곰팡이를 보면서 잠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지도. 그래서 내가 유독 대단지 쾌적한 아파트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생각이 많아졌다. 요즘 에세이 같지 않게 너무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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