삘기 꽃

by 강쌍용

삘기 꽃


봄날의 해는 길었다. 학교를 마치고 책 보따리를 던진 마루에는 아직 햇볕이 짱짱하다. 몇 번의 단비에도 웃 새미(우물) 해갈은 풀리지 않았는지, 어림잡아도 줄을 선 양동이가 열 걸음은 될 것 같다. 삽짝 사철나무도 연두색 이파리를 쑥 밀어 올렸다. 작년 가을에 삼단으로 층을 냈던 수형이 온데간데없이 헝클어졌다. 녹이 벌겋게 핀 가새(가위)로 하릴없이 가지를 다듬는다고 아버지가 바빴다. 이것 가져오라. 저것 치우라. 뻔한 아버지의 심부름을 피해 도망친다고 식겁을 했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늦었다고 타박이다. 웅성거리며 넘어가는 들길에 햇살이 폭삭하게 내렸다. 인기척을 듣고 놀란 종다리 떼가 마늘밭에서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댕백이(산 이름) 황토 비탈을 가린 무성해진 물오리나무 때문에 온 산이 파랬다. 약간의 허기와 무엇이든 손에 거머쥔 것이 없다는 것 말고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릎까지 자란 풀들이 안 그래도 좁은 들길을 덮어버렸다. 애먼 짓에 아이들이 자꾸 깨 고랑에 발을 헛디뎠다. 하마터면 자빠질뻔한 녀석이 먹어리(산개구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뒤따르던 녀석이 멈칫하다 별일도 아닌데 호들갑 떤다고 핀잔을 주었다. 물이 마른 웅덩이에 웃자란 익모초가 홀로 미쭛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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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짐 마른 대가리에 쭈뼛쭈뼛 일어선 머리털같이 들판 한가득 삘기가 키재기를 했다. 촘촘하게 기립한 삘기가 어떤 것은 벌써 배가 불룩하게 솟았다. 나올락 말락 삐져나온 은백색의 솜털이 늦은 봄 햇살에 눈이 부셨다. 삘기를 뽑는 아이들의 손이 분주했다. 덩달아 입도 바빴다. 야들야들한 삘기는 불통만 불 수 없을 뿐이지 츄잉껌처럼 달짝지근했다. 이빨 새로 쩍쩍 달라붙으면 땟국물 끼인 검지로 잇속을 후빈다고 낑낑거렸다.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뽑는지 시합이 붙었다. 이리저리 눈썰미를 돌린다고 한동안 주위가 잠잠했다. 실뱀같이 드러누운 밭두렁에 완두콩이 제법 자라 소복이 넝쿨을 이루었다. 지쳤는지 한 움큼씩 삘기를 거머쥔 녀석들이 오동나무 그늘로 모여들었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삘기들이 벌써 생기를 잃고 시름시름 했다. 얼마나 앙금에 시달렸는지 허리가 접진 삘기가 수두룩했다. 꼬장섬 뒤로 어느덧 해가 빠졌다. 먼 소쿠리섬에 구름이 저렇게 걸리면 다음 날 비가 온다고 어른들이 그랬다. 한 녀석이 다리가 욱신거린다며 풀밭에 드러누웠다. 녀석들도 따라 누웠다. 올려보는 말간 하늘에 삘기 꽃 같은 구름이 뭉실뭉실 떠 올랐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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